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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11호) 재일 거류민단 오오타 지부의 환영

관리자 2019-10-11 (금) 18:08 4년전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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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원폭평화전시관을 방문한 이강호 단장(가운데)>


5月 10日은 재일 거류민단 동경오오타 지부의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금년 1월 동경에서 민단 오오타 지부의 감찰위원 윤구차 씨, 민단신문 부국장 배철은 씨、월간일본의 주관 남선팔랑 씨와 인연이 있어 남 씨로부터 인터뷰 형식으로 월간 일본에 「내가 들은 3.1독립운동」이라는 제목으로인터뷰 글이 게재되기도 했다.
일본에 도착한 날, 민단의 관계자와 예정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제 부임한 이강호 단장님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오오타구 민단의 부인회 회장이신 나호미(羅保美) 씨와 환담을 나누었다.
이 민단의 뜨겁고 뜻깊은 만찬이 끝난 그 이튿날부터 나는 동경에서 다른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동안에 이강호 단장은 벌써 한국에 와서 방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날 오전에 한국원폭평화전시관을 방문해 주셨다. 앞으로 다카하시 관장님의 일을 도와주시겠다는 고마운 말씀도 해 주셨다.
  이날 단장께서는 관장님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사단법인 민주평화노인회」를 소개해 주셨다. 이 단장의 성실함과 뜨거운 열성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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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음 사무실을 방문하신 이강호 단장>


 며칠 후 나는 귀국하여 10일 후 이 단장이 소개해 주신 「사단법인 민주평화노인회」 사무실을 방문하였는데, 회장님은 출타하시고 그 대신 황기화 실장과 송 사무국장을 만났다. 앞으로 한국원폭전시관이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꼭 만나 달라고 부탁하신 이강호 단장님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 된다.
 여담으로 일본인 지식층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민단 소속의 김달수(金達寿) 씨의 이야기를 말씀 드리겠다. 
달수 씨는 경상남도 출신으로 다섯 살 때 무슨 이유인지 집이 없어지고 만다. 부모와 큰형과 여동생은 일본으로 가고 비좁은 집에 할머니와 둘째 형과 달수가 남게 되었다.
 왜 자기와 작은 형만 남겨두고 일본으로 가버렸는지 이유도 모른체 다섯 살인 소년은 부모가 그리워서 밤마다 이불 속에서 울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부모가 보내주는 송금도 끊어질 무렵 11살 된 둘째 형이 죽고 달수와 할머니 두 사람만 남았다. 그리고 1년 후, 이번에는 「부친 사망」이라는 전보를 받았다.。
아버지의 유골을 한국으로 모시고 와서 고향 산에 숙부와 함께 안치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자 당분간 숙부 집에 있어 달라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기차를 타고 밤늦게 숙부 집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는 아이들이 북적대고 있었고 온돌방은 화장실 냄새가 진동했다.
숙모는 고개를 숙이며 “이런 황소 같은 큰 애를 데리고 오면 어떡하라고.”하며 숙부에게 불만을 터트리는 숙모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 자기의 비참한 모습이 떠올라 다음날 새벽에 도망을 쳤다.
달수 씨는 자기 집은 어딘지 모른다. 하지만 어제 타고 온 기차의 선로를 따라가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여덟 살 소년 달수는 열심히 선로를 따라갔다. 저녁 무렵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어딘가 낯익어 보인다. 아~ 이제 집이 가까워진 것 같아 밝은 마음으로 2리를 더 걸어가니 마을 입구에 닿았다. 길 건너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앗! 할머니다’
저녁 해는 이미 서산에 넘어가 확실한 모습은 아니지만 할머니가 틀림없다. 달수 소년은 달려갔다. 할머니도 비틀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달수는 엉엉 울면서 달려가고 있다.
“할매~~”
“달수야!”
 둘은 길바닥에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16살이 된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일본에 있는 큰형이 달수와 할머니를 데리러 왔다.
“동경에 가자”
하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가지 않는다고 한다.
“할매, 왜 안가세요?”
“얘야, 내가 일본에 간다 해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인데, 내가 만약 일본에서 죽는다면 나는 화장을 하겠지. 화장은 싫다. 달수야 너만 가거라”
할 수 없이 할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달수는 형과 함께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배를 탈 때 형이 사준 도시락 한 개만 먹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시모노세키 항구에 도착, 밤늦게 도쿄의 시나가와역에서 내려 고텐바의 언덕을 올라가 한동안 이곳저곳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막다른 집 나무짝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컴컴한 마루방이 보인다.
두 사람이 마루방에 들어서자 갑자기 문이 열리고 나온 어머니가 황급히 달려나온다.
“아이고, 달수야!~ 아이고 달수야!!”
어머니는 달수를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그렇게 일본 생활이 시작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무렵 김달수는 어느새 민단의 지적인 거두로 성장했고 많은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줬다.
나는 이 사람이 쓴 책을 읽고 일본 속의 한국을 배웠다. 민단의 지적인 거두로서 이진희、강재언 등이 있었다. 김달수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칭찬할 정도로 지적인 거두로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신세타령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인생체험이다. 나도 18세 무렵 신세타령이라고 할 만한 쓰라린 인생체험을 하고 있지만 김달수 씨를 따라가지 못한다. 김달수 씨가 민단의 지적인 거두가 된 인생체험은 10살 때부터 오오다구의 에바라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전에 오오다구에서 만난 민단의 여러분도 쓰라린 인생체험의 신세타령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오다구의 민단이라는 말만 들어도 후광을 느끼면서 민단의 전도가 밝아지길 기원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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