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폭 20년의 한국과 일본 > 원폭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회원메뉴

쇼핑몰 배너

피폭 20년의 한국과 일본

관리자 2018-01-13 (토) 13:13 6년전 907

피폭 20년의 한국과 일본

 

  1945년 8월 6일, 그 날 히로시마에 있었던 사람들은 41만~43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원폭이 투하되고 겨우 10초 만에 이 대도시는 붕괴되었다.
 그 후 69년이 지난 2014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그해 돌아가신 피폭자는 5천5백7명으로 지금까지 모두 29만2천3백2십5명이 사망하였으며 일본에서 피폭수첩을 가지고 있는 생존자는 19만2천7백십9명으로 총 피폭자수는 48만5천4백4명이 되는 셈이다.

  이 숫자에는 당연히 한국 피폭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일본은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 시장과 나가사키 시장이 세계를 향해 평화선언을 하였다.
 그것을 한국의 일부에서는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가해국인데 원폭투하된 것을 핑계로 전쟁의 피해국인양 하는 것은 위선적이다” 라고 하고 있다.
 지금 세계에는 만 6천개의 핵탄두(核弾頭)가 있다. 만약 이 백분의 일이라도 사용된다면 인류는 지구에서 소멸될 것이다.
  북한은 지금 핵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은 더욱 전쟁이나 핵에 대한 반대의 손을 들어야 할 것이며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한국피폭자가 더 민감해져야할 것이고 본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몇 년 전에 한국 피폭자에게 이야기해 보았다.
  하지만 피폭자는 “글쎄요 우리들은 그런 힘이...”하고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역시 아직은 조직이 안 되어 있고 자금도 없다는 것이다. 피폭자 10명 중 1명은 한국인이라고 추정되며 그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 왜 일본 피폭자와 한국피폭자 사이에서 이렇게 차이가 생겨버린 것일까?
  이것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작년 8월 6일 일본은 비가 왔다. 그 비속에 모인 사람들은 주일 미국대사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캄보디아 등 68개국의 대표를 포함하여 자그마치 4만 5천명이 모였다. 일본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2014년 원폭ㆍ수폭 금지 세계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전 세계에서 7천명이 일본에 참석하였다.
  “핵무기를 없애자”
  “행동으로 옮기자”
  이런 호소에 서명을 한 410만 명의 명부를 앙겔라 케인 유엔 군축담당 고위대표에게 직접 건네주자 행사장에는 큰 환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날 행사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보낸 메시지를 이 앙겔라 케인 씨가 대독하였다.
  그 외에도 전 일본학생자치회 총연합이 「핵무기를 없애자, 전국학생교류회 in 히로시마」를 열었는데 고등학교 학생들이 원폭 그림을 그려서 “잊지 않겠다. 그 날의 히로시마”라는 주제를 그 곳에서 발표했다.
  미야기 현 센다이시의 칠석(七夕)축제 계절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다나바타 시민들의 모임”을 열고 평화를 기원하는 종이학 18만개를 만들었고 또 전국에서 보내온 평화를 원하는 종이학의 수가 100만개가 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영원한 마돈나라고 불린 여배우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는 매년 원폭에 관한 시를 낭독하고 있다. 올해는 2011년 동북 대지진으로 너무나 큰 희생자가 생긴 후쿠시마현 이와키 시에서 낭독했다. 이렇게 반전, 반핵 모임은 히로시마뿐이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고 있다.

  왜 8월 6일에 세계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히로시마에 모이는 것일까?
  그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피폭을 경험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만큼 원폭의 공포, 잔인성을 세계에 호소하려고 하는 일본인의 진심, 진지함이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인의 진지하고 절실한 마음이 전해진 덕분인지 워싱턴, 파리, 브라질에서도 반전반핵 집합이 열리고 있다.
  하지만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시장이 일본이야말로 세계유일의 피폭국가라는 말을 매년 말하고 있지만 한국인도 7만 명~ 8만 명 피폭 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계유일의 피폭국가는 일본뿐이 아니다. 대한민국도 있지 않은가.
  이 점, 1990년대 히로시마 시장을 지냈던 히라오카 타카시(平岡敬) 씨는 1965년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피폭자의 참상과 어려운 현실을 자신이 근무하는 신문과 잡지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 히라오카 씨는 단순히 피폭자의 참상만을 본 것이 아니고 한국피폭자 뒤에는 가해국 일본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근대전쟁의 역사, 전쟁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즉 말하자면 한국을 식민지로 해서 일본군은 그 때 무엇을 했는가, 그런 일을 정확히 파악한 상태에서 히로시마를 호소했기 때문에 히로시마는 세계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본과 한국 원폭관계사를 연대별로 살펴보도록 하자.

1945년 8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 조선인이 8만 명 살고 있었고 7만 명이 피폭 당해 3만5천 명 사망.
나가사키는 3만 명 피폭을 당하여 만 5천 명이 사망. 이 중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인원은 히로시마 3만 명, 나가사키에서 만3천 명으로 총 4만3천 명이 귀국했다고 추정.
 
1945년 9월
- 미국조사단,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해 조사
- 원자폭탄 재해조사연구 특별위원회 설치
- 미일 합동조사회합이 열림

1946년
-7월 원폭조사위원회, 피해자 호적작성이 결정됨

1948년
-2월 일본적십자사 간호학원발족
-8월 대한민국수립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10월 일본 원폭피해생존자 전국조사

1952년
-7월 원폭위령비문 완성
-8월 원폭피해자회 결성

1954년
-8월 원폭 조사위원회 치료방침 발표

1955년
-5월 원폭소녀 25명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출발
-6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개설
-8월 제1회 원.수폭금지 세계대회가 열림 (히로시마)
-8월 나가사키 평화기념상 제막

1956년
-8월 일본 원.수폭 피해자단체 협의회 (일본피단협) 결성
-9월 히로시마 원폭병원 개설.

1957년
-3월 원폭의료법 공포.

1958년
-4월 중의원 원.수폭금지를 결의.

1963년
-12월 원폭소송, 원폭투하는 국제법상 위반으로 판결


1965년
-3월 한국에 203명의 피폭자가 있다고 방송 (서울 방송)
-한국피폭자 실태조사 (재일 히로시마 민단)
 
1966년
-8월 한국피폭자 좌담회 방영 (서울 동양방송)
-히로시마 시의회 원폭돔 영구보존 결정

1967년
-7월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 원호협회 발족 (연말까지 1,857명 가입)

  원폭투하에서 약 20년의 주요 관계 자료를 서술 해 보았다. 이 20년을  간추려 보면 한국과 일본 피폭자들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원폭이 인체에 미치는 부작용은 글로 적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우라늄이나 플로토늄 성질을 가진 방사성의 피해는 그 열선이나 열풍을 맞으면 중추신경 손상, 뇌 부종, 심기능 부전, 위장 손상, 출혈, 탈수, 구토, 설사, 권태, 탈모, 백혈구, 혈소판의 감소, 백내장, 악성림프, 케로이드 증상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증상이 나타난다.
  만화 “맨발의 겐”의 작자 나카자와 케이지(中沢啓治) 씨는 자신의 엄마를 화장했을 때 인골은 없고 하얀 작은 콩 같은 것이 몇 개 남아있는 것을 보고 “원폭은 엄마의 뼈마저 빼앗아 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원폭증이라는 병은 현대의학도 완치 방법이 없을 정도로 어렵다.
그러기 때문에 원폭피해자에 대해서는 국가가 이 문제에 맞서야한다.
  이 점에서 일본은 원폭자를 보호하는 법률을 국회에서 의결하고 원폭병원을 개설, 피폭자를 지키는 외곽단체로서 “일본피단협”을 결성했다.
  이것은 일본 전국이 도도부현(都道府県)에 지부를 만든 것이다.
  피단협은 각 현 뿐만이 아니라 그 현 하나의 작은 시까지 조직을 만들어 피폭자를 보호하고 관리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국가가 법률로 보호하고 의료계가 전력을 다하며 또 사회 속에서 300개가 넘는 원조단체가 생겨 피폭자를 지켜주었다.

  하지만 한국피폭자는 피폭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피폭자 203명이라는 조사보고를 발표했고 그 2년 후에야 드디어 “한국원폭피해자 원호협회”가 생긴 것이다.
  이 해 11월 피해자 20명이 서울 일본대사관에 보상요구 시위를 했지만 그 정도로 일본 측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피폭자 중 조국에 돌아온 사람은 4만3천명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모든 병중에서 가장 극진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 피폭자들은 아무런 치료를 받을 수 없었고 아무도 사회에서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지 않은 1965년까지 20년 동안 4만3천 명 중 얼마나 많은 분들이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을까?

 

 


추천도서더보기▶

고향의 산 만월하에서

고향故鄕(고향)의 山(산) 滿月下(만월하…
by 관리자

불교와 여성(佛敎와 女性)

 불교와 여성(佛敎와 女性)&…
by 관리자

한일의 유광

 “한일의 유광(韓日의 流光)”…
by 관리자

인간의 생과 사 ​(人間의 生과 死)

​인간의 생과 사 ​(人間의 生과 死)&…
by 관리자

안중근의 유필에서 배우다

 대한국인  안중근의 …
by 관리자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
by 관리자

원폭피해사진더보기▶

원폭으로 사망한 가족들을 화장, 화상을 입고 도망치는 사람

원폭으로 사망한 가족 화장,  …
by 관리자

강에 쌓인 사체들, 피폭으로 자식 잃은 부모

강에 쌓인 사체들, 피폭으로 자식 잃은 …
by 관리자

도시의 불바다 "살려주세요?"

도시의 불바다 "살려주세요?"​​​​화염…
by 관리자

원폭의 불바다 "죽음의 재"

원폭의 불바다 "죽음의 재" ​​원폭이 …
by 관리자

히로시마의 참상 그림(피폭당한 사람들)

히로시마의 참상 그림(피폭당한 사람들)​…
by 관리자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의 목적?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의 목적?​​…
by 관리자

한국원폭평화전시관   한국원폭평화전시관 관장 : 고교목남   주소 : 서울시 노원구 동일로 237다길 16 1층 관람안내 : (02) 934-9828   팩스 : (02)933-9828   이메일 : csh230@naver.com 후원계좌 : 하나은행 290-910008-91405    개인정보보호책임자 : 최숙희 Copyright © 한국원폭평화전시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