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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天)의 때라는 비애

관리자 2018-01-13 (토) 12:57 6년전 896

천(天)의 때라는 비애

  한 인간이 또 하나의 집단이나 사회가 발전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성취하는 조건 중 하나로 “천(天)의 때, 땅의 이치, 인간의 화합”을 얻는 소중함이 있다.
  한국피폭자가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설립했다는 것은 피폭 이래 20년,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이제 겨우 “인간의 화합”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 피폭자들은 이 인간의 화합을 얻고 일본처럼 국가나 사회로부터 사법계로부터 따뜻한 손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점도 일본의 사례와 함께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한국과 일본의 피폭 차이 중 하나는 한국은 사람만 피폭당한 것이지만 일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산천과 거주했던 가옥과 학교와 모든 건물까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폐허가 되었다.
  히로시마에는 히로시마 성이라는 아름다운 성이 있었고 또 나가사키에는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건물이 한순간에 파괴되었고 포상 천주교 성당에서는 2명의 신부와 20명의 신자가 기도를 하고 있는 중에 돌아가셨다 한다.


“나라는 파괴돼도 산천은 여전히
성(城)은 봄이 되어 초목은 더 깊어간다”

  이 노래처럼 전부 파괴는 되었지만 그러나 봄이 오면 산천초목은 변함없이 살아 우거져 있었다.

아버지를 돌려다오
어머니를 돌려다오
노인을 돌려다오
어린아이를 돌려다오

나를 돌려다오
나에게 연관된 인간을 돌려다오

인간의 세상이 존재하는 한
무너지지 않는 평화를
평화를 돌려다오

  원폭의 시인이라 불리는 도게 산키치(峠三吉)의 작품이다.
  어른이나 아이도 누가 읽어도 잘 알 수 있는 시이다.
  이 도게 산키치 씨도 피폭을 당하여 3년 후에 죽게 된다. 그래서 이 시가 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노벨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郎) 등이 물리학자로서의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평화연구소”를 만들었다.
  또 나가이 타카시(永井隆)라는 사람은 나가사키 대학에서 방사선 의학을 배운 박사이다. 나가사키 대학은 폭심지에서 7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어서 피폭 당시 왼쪽머리 동맥절단이라는 큰 중상을 입게 된다.


  치료와 요양을 해야 하지만 방사선연구를 하는 의학자이기 때문에 “피폭자들의 치료는 나의 전문과목이다”라고 하면서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피폭자의 치료를 먼저 하게 된다. 3일 후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집에 가보니 허물어진 부엌에는 부인 미도리 씨가 뼈만 남아있는 상태로 있었다.
  이듬해 9월, 머리 부상부위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혼수상태가 되지만 기적적으로 회복한다. 기력이 있을 때는 의학자로서 피폭자를 돌보다 쓰러지다가 또 몸이 회복하면 돌보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가이 씨는 2명의 아이가 있었다. 의학자이기에 자신의 생명이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미 아내도 뼈로 되었고 자신이 죽으면 엄마도 아빠도 없는 2명의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만이 큰 걱정이었다.
  그런 자신의 체험을 글로 기록하여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이름의 책을 출판하였고 전쟁으로 부모, 자식을 잃은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 실화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노래로 불리게 되었다.

 부름을 받은 아내는 천국으로 (召されて妻は 天国へ)
 헤어져 혼자 세상을 떠나 (別れてひとり 旅立ちぬ)
 유물로 남은 묵주 (かたみに残る ロザリオの)
 사슬에 나의 뿌연 눈물 (鎖に白き わが涙)
 달래고 격려하는 나가사키의 (なぐさめ はげまし 長崎の)
 아아 나가사키의 종소리가 울린다 (ああ 長崎の鐘が鳴る)

  이 노래는 아름다운 소프라노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郎)가 불러 큰 인기를 끌었다.
  나가이 타카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라는 뜻을 품어 “여기당(如己堂)”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생활을 하며 가난한 생활 속에서 황폐해진 포상의 땅 위에 꽃을 피게 하려고 천 그루의 벚꽃을 심었다 한다.
  그런 일이 일본을 비롯해서 세계에 알려져서 헬렌 켈러 여사도 위문을 하였고 또 로마교황의 특사도 왔다. 노래 가사에도 있는 묵주(천주교에서 기원할 때 쓰는 염주)는 이 특사가 로마에서 위문 선물로 가지고 온 것이다.

  “노래는 감정의 표현이다”하고 말하는 것처럼 노래와 문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때로는 흥분을 시키기도 한다.
일본의 원폭피해가 일본전국의 어른들로부터 어린이들, 그리고 세계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진 것은 원폭에 관한 문학이 생기고 또한 많은 노래로 불리는 것도 큰 힘이 된 것은 틀림없다.
일본에서 원폭이 투하 된지 20년, 다양한 각도에서 원폭피해자들을 보호하는 준비는 거의 완료하였지만 그렇다면 한국은 과연 어땠을까?

  1945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해방된 한국 사람들은 기뻐하였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은 끝에 간신히 1948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2년 후 북한이 일으킨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크나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 전쟁은 3년 동안 계속되어 휴전으로 일단락되었다.
  휴전은 잠시 전쟁을 멈춘 것이지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직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은 과도한 국방비 부담으로 다른 복지에 투자할 여력이 매우 적었고 그런 이유로 사회복지 대책에 관한 예산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에 더해서 1965년 한일 협정 조인 시 일본이 낸 5억 달러로 일본은 한일 사이에 일어난 모든 과거는 청산했다고 했기 때문에 한국피폭자 관계자들이 여러 소송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이 1965년의 한일 기본조약이 큰 장벽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1968년 1월에 히로시마의 평화공원에서 처음으로 한국원폭위령제가 열리자 한국에서는 최초로 한국인 원폭위령제가 서울 조계사에서 열렸고 이때부터 한국피폭자 사이에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2일 한국인 피폭자 손귀달(孫貴達) 씨가 일본으로 밀항하다 체포되었다. 일본에서 원폭 병의 치료를 받고 싶다는 이유이었다.
  밀항까지 하면서 치료를 받겠다니 너무 안타깝다. 당연히 치료를 해 줘야하겠지만 다만 법을 위반하였기 때문에 체포를 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다음 날 야먀구치 현에 있는 피단협 외 다른 단체에서도 손귀달 씨를 구제하자는 성명이 나왔다.
  그러나 11월 손 씨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이라는 판결이 나와 한국으로 송환하게 되었고 이 일은 한국과 일본에 큰 파문을 던지는 일이 되었다.

  1970년 4월 10일 히로시마에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완성하여 제막했다.
  1971년 9월에는 핵금회(핵병기 금지 평화건설회의)가 의사 4명을 파견하여 서울 등지에서 920명의 피폭자를 진료했다.
  이 핵금회가 73년에 합천에 원폭피해자 진료소를 건설하였고 한국피폭자에게 작으나마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고무된 점은 1980년대 일본과 한국의 국회의원 간에 합의한
  1. 한국 의사의 일본파견과 훈련
  2. 일본 의사의 한국파견
  3. 재한 피폭자가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에 대한 논의 및 진행이 된다.

  1980년 10월에는 치료기간 2개월, 치료비는 일본, 여행비용은 한국이 부담한다는 기본원칙이 확정되어 한국피폭자 10명이 히로시마 원폭병원에 입원하였고 81년 6명, 82년 26명, 83년 69명, 84년 88명, 85년 58명으로 순조롭게 늘어났지만 87년에 한국정부는 도일 치료를 중단하고 국내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는 1985년 일본 피폭자 보호단체는 나가사키 대학의 가마타(鎌田)교수를 단장으로 10명이 ‘한국피폭조사단’을 파견해서 8일 동안 한국 5개 도시를 돌아보면서 피폭자조사를 하였다.
  이 때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한국피폭자 구제에 대한 요청서”를 지참하고 보건부 의정국장을 만나 1시간 논의를 했는데 이때 한국 담당자의 말을 듣고 일본 원폭관계자로서는 놀랐다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도일 치료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관광여행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단지 옛날에 살았던 일본을 그리워서 가고 싶은 것뿐이다.”
  “피해자의 도일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일본정부나 민간인이 한다면 언급은 안하겠지만.”
  이 말을 들은 가마타 단장은
  “한국정부는 피폭자 구제에 너무나 소극적인 모양이다”하고 실망하였다 한다.

  87년부터 한국은 도일 치료를 중단하고 국내 치료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일본은 한국피폭자들에 대해 관여할 수가 없게 되었고 한국과 일본의 피폭자 관계는 소원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 해 11월에 한국피폭대표가 서울의 일본대사관을 방문하여 일본정부에 대해 보상금 23억 달러를 요구했다.

  일본은 피폭자를 위해 40억 엔을 준비했다.
  이 40억 엔이라는 돈은 한국 피폭자들에게는 어떤 돈이 되었을까.
  73년에 핵금회의가 합천에 원폭피해자 진료소를 건설한 것은 전술했다.
  내가 이 시설을 본 것은 90년대 초 이었던 것 같다.
  분명히 진료소 안에는 진료대가 있고 침대도 나열되어 있었다. 원폭병원의 건설은 한국피폭자들의 절실한 소원이었고 몇 번이나 그 목소리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나왔었다. 진료소는 겉에서 보기는 근대 풍의 건물로 보여 “한국에도 이렇게 멋진 병원이 있네”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막상 병원 안에 들어가 보고 또 다시 놀랐다. 진료소 내부는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물론 입원 환자도 사무원도 없었다.
  “이거 왜 이렇게 됐어요?” 하고 물으니 “아니, 일본이 이 건물을 세워줬지만 유지비를 안 주기 때문에 유지를 할 수 없어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은 인턴이 와서 감기 환자 정도는 보고 가세요.” 라는 대답이다.
  생각해보니 원폭투하 20년이 지나 겨우 한국에도 피폭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본에 몇 번이나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35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해를 해주고 협력을 해주게 되었는데 그것이 전술한 바와 같이 5년 후에는 불타려고 했던 불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때 한국 피폭자의 목소리는
  “원폭병원 따위 필요 없다. 어차피 곧 죽을 터인데..”
  “더 이상 우리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도록 해주세요...”
  이런 절망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일본에서 받은 40억 엔은 피폭자1인당 한 달에 10만원을 지급하고 있었는데 회비 5천원을 공제하면 한 달에 9만 5천원 밖에 되지 않는다.
  어떤 피폭자는
  “우리들도 한 달 동안 여기저기 다녀야 하는데 고작 9만 5천원은 한 달 교통비에 불과해요”
  피폭자에게 일본정부가 40억엔을 지급하겠다는 보도를 봤을 때는 “다행이다. 앞으로 피폭자들도 조금은 편안하게 살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혀 아닌 것이었다.
  하지만 40억엔을 지급했으니까 한국피폭자는 일본에 더 지원금을 내라고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고 또한 한국정부가 국내 치료를 내세워 피폭자는 국내에서도 불평불만을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이런 복잡한 역사 속에 올해 피폭 7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평균 80세가 넘는 피폭자들에게 7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1973년에 출판된 “원폭 문학사”에 다음과 같은 대담이 실려 있다.
  “조선인 피폭자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번에 다시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랬어. 한국에 있는 피폭자들은 심하게 차별을 받고 있었네. 너희들은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든지 순수하지 않다든지 하는 그런 말을 듣는다고...”(p241)
  한국 피폭자들은 차별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누구한테 차별을 받았냐고 물으면 “국가로부터...” 이것이 대답이 아닐까 싶다.


  한국 정부의 견해로는 “피폭자의 문제는 성인병 대책의 일환으로 관리하고 별도의 지원책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하고 1984년에 발표되었다.
  이렇듯 국가가 피폭자를 인정하지 않은 한 그에 준해야 되는 것으로 85년도에 가마타 씨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방한했을 때와 86년도에 일본 변호사협회에서 시이나(椎名) 씨 등이 방한 기록을 보면 인터뷰를 할 때 경찰이 나타나서 피폭자들이 진실한 말을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피폭은 국제적인 문제이다. 그러한 큰 문제에 국가의 이해와 국가의 보호가 없다면 피폭자가 살아가는 일이 무척 어렵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 피폭자의 70년의 역사를 보면 여러 가지 많은 노력과 비장함에도 불구하고 일본같이 국가가 전적으로 배려하고 보호 해 주는 조치가 없었다는 비애가 있다.
  피폭당한지 20년 만에 겨우 한국에 피폭자가 발견되어 이름을 밝히게 되었고 피폭협회도 생겨 그때 “인간의 화합”이 생겼다.
  나머지는 사람들의 노력, 이해, 분투가 천(天)의 때를 만들어 간다.
  이 천의 때가 생기려 했을 때 사람들의 노력을 비웃는 것과 같이 누군가가 이것을 부셔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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