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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 나가사키의 기억(피폭자의 목소리)

관리자 2018-02-25 (일) 07:37 6년전 771

히로시마 · 나가사키의 기억

- 피폭자의 목소리 -

원폭으로 피해를 입은 사라들은 생활이 일변하고 장기간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피폭자는 개개인이 생각하기도 끔찍한 피폭의 기억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 다시는 누구에게도 같은 경험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핵무기를 근절하고 싶다’는 강한 염원에서 자신의 피폭 체험을 후세에 호소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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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이 두려워 촬영을 거부하는 피폭자(히로시마)
건강에 대한 불안뿐만 아니라 편견 등의 사회적 불리함도 피폭자를 괴롭힙니다.
피폭자인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985(쇼와 60)년   촬영/오이시 요시노 씨

 

다니구치 스미테루 씨(나가사키 피폭 당시 16세)
다니구치 씨는 폭심지에서 2km 떨어진 노상에서 뒤에서 피폭하여 등과 팔 등에 큰 화상을 입었습니다. 3일째(8월 11일) 아침까지 구조되지 않았고, 11월 1일에야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3년 7개월의 병원 생활을 강요당하고 그중 1년 9개월은 생사를 헤매며 지옥의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1991년, 제가 독일에 갔을 대 교사에게 특수 교육을 하는 학교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때 교사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리 앉았습니다. 왜냐고 묻자 가까이 가면 방사능이 전염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가ㅔ 살아가기 위해서는 ‘핵과 인류는 공존할 수 없다’라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993(헤이세이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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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닦이를 하는 형제(히로시마)
피붙이를 잃은 고아들의 일부는 고아 수용소나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사는 아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1948(쇼와 23)년 무렵    촬영/사사키 유이치로 씨   제공/시오우라 유고 씨

 

마스바라 미요코 씨(히로시마·피폭 당시 12세)
마스바라 씨는 폭심지에서 1.5km 떨어진 건물 속 현장에서 피폭하여 전신에 큰 화상을 입었습니다. “눈썹 없이 벌겋게 부어오른 켈로이드의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봤을 때 저는 놀라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눈물만 흘렀습니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대신 해줄 수 있다면 대신 해주고 싶다. 나는 늙어 살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라면서 우셨습니다.


“저는 졸업을 했지만, 얼굴에 켈로이드가 있다는 이유로 취직할 수 없었습니다. 18세 때, 오사카 시림 의대에서 7개월간에 걸쳐 12번, 양손과 팔, 안면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로 켈로이드를 제거해도 수술한 곳에서 또 새로운 켈로이드가 부풀어 올랐습니다.”


“결혼 적령이게 백혈병, 원폭증이라는 소문이 돌아 불임, 유산, 사산 등 여성 생식성의 이상이 세상에 알려져 사람들은 원폭증을 두려하여 우리 같은 피폭 여성은 부당한 결혼 차별을 받았습니다.     

1986(쇼와 61)년

가와모토 쇼소 씨(히로시마 피폭 당시 11세)
가와모토 씨는 학동 소개 처에 있어서 직접 피폭은 면했지만, 다음날 가족을 찾으러 히로시마 시에 들어와 잔류 방선으로 피폭했습니다. 또한, 원폭으로 부모님과 누나를 잃고 고아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살아가게 된 저이지만, 그 히로시마의 잿더미 속에서 주위 사람들도 자기 살기에 급급하여 타인을 돌보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생략) 결국 강한 자만이 남고 약한 자는 굶주림과 추위로 점점 죽어갔습니다.


“저는 열심히 일을 계속 했습니다.(생략) 저는 ‘결혼한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하고 있다’는 생각에 당시 사귀던 여성의 집에 청혼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생활하고 있었더군요. 그 당시 히로시마에 있던 사람은 모두 오염되어 태어날 아이도 장애를 가진 아이가 많다고 하더군요. 그런 남자에게 딸을 줄 수 없습니다.’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정말 괴롭다. 하지만 그때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그리고 전쟁의 비인도적이고 비참함, 전쟁에서 남겨진 고통을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헤이세이 201)년

​* 출전 :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 기관지 "평화 문화" 제59호, 제100호, 제1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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