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원폭으로 돌아가신 영령들에게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살고 있었던 한국인은 7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원폭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약 35,000명입니다. 이 35,000명은 원폭이 떨어지고 10초 만에 돌아가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10일 후, 1년 후, 2년 후에 돌아가신 사람을 원폭 중환자라고 합니다.
일본이 전쟁에 지고 한국은 독립이 되어 피폭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피폭자는 3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피폭 중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원폭피해자협회 서울 전 지부장 원정부 씨는 히로시마 천만 초등학교 1학년 때에 피폭을 당할 때, 어머니는 29세, 동생 마쨩은 태어나서 4개월이었다고 합니다. 그 해 12월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다음해 4월에 한 살이 된 여동생 마쨩이 죽고 또 어머니는 4년 후에 33세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고, 약도 없고 그저 괴로운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내 가족이 이렇다면 하고 생각했을 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방금 말씀드린 체험을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사료됩니다.
「다시는 용서 말라 원폭을」 「다시는 용서 말라 원폭을」 이 원폭의 노래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시대 친구가 부르고 있는 이 부분만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의미는 몰랐습니다. 겨우 이 노래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45년 후 한국에 와서 한국원폭피폭자의 모습을 보았을 때입니다.
「다시는 용서 말라 원폭을」 이것을 사회에, 세계에 호소하는 것은 우리들보다 원폭 피폭자 여러분이 하시는 것이 더 많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행동 하나로 우리들과 같이 핵무기 폐기 백만 명 캠페인에 피폭자 여러분께서도 어깨띠를 두르고 같이 목소리를 높여 주셨습니다.
저는 30여 년 동안 피폭자와 같이 걸어왔습니다만, 이번에 피폭자가 타인을 위하여 행동한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피폭자 여러분, 그 존귀한 모습, 존귀한 마음을 잊지 마시고 더욱 더 존귀한 길을 힘차게 걸어가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핵무기 폐기 100만 명 캠페인은 정식으로 5월 20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캠페인 횟수는 48회, 동원 인원수는 279명, 서명인원수는 5천5백60명입니다. 3년 후에 100만 명을 목표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