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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단체 태양회, "평화의 불을 점등하다"(2006.8.6.)

관리자 2018-03-05 (월) 03:30 6년전 5095  

태양회 평화의 불을 점등하다

 

머리말
내가 처음 평화를 조금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생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가니 '평화논문모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고 1등 상금이 분명히 백만 엔으로 1등은 어렵겠지만 3등이나 5등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응모하였습니다.


이 논문 모집은 세계적인 규모로 행하여져 평화란 자기 나름대로 조사하고 생각하여 자기 스스로 결론을 내린 것은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그 후 삼십 여년, 학생시절에 조사한 것이 다소나마 힘이 되어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 나름대로 평화를 주장하고 실천해 왔습니다.


'일우를 비춘다'고 하는 발상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봉사단체 태양회의 운동도 넓게 말하면 평화에의 공헌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일우를 비춘다'고 하는 문은 덴교대사의 사상이지만 법화경에 '일지소생 일우소윤'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어떤 초목에도 평등하게 내리는데 코스모스의 꽃이 삼나무같이 큰 나무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원래 국민은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면 평등하게 국가사회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데 사회는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나 태어날 떄 장애를 가진 아이, 여러 가지 불행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사회는 그들의 실제의 어버이로는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사회의 한편에 사람으로서 충분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밝게 따듯한 손을 내어 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일우를 비춘다' 태양회의 봉사활동은 이렇게 하여 발족,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조금씩 그 실력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평화의 불'에 관하여 말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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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불 발견
2002년의 12월, 장래 오중탑을 건립하고 싶어 오중탑 사진을 찍었습니다.
일본의 나라의 호류사의 오중탑, 닛코의 토쇼구의 오중탑, 토쿄의 이케가미 혼몬사의 오중탑, 그리고 우에노의 칸에이사의 오중탑, 평화의 불은 이 우에노 칸에이사에서 발견했습니다.


칸에이사의 오중탑이 동물원 가운데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오중탑의 지붕 한 부분을 보면서 어느 쪽에서 전체를 찍을 수 있을까 여러모로 생각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칸에이사 토쇼구의 앞에 왔을 때 반전 평화의 불을 발견한 것입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이 불은 야마모토 다츠오씨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불이 원화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불을 한국에 분화할 수 없을까 하고 우선 불의 관리 등을 일본태양회의 야마시타와 오오야마씨께 조사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관리자는 오노데라라고 하는 변호사이며, 만나보니 조금 기연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동생의 고문 변호사인 시이나 여사가 일찍이 한국에 가서 한국 원폭피폭자의 실태를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이나 변호사의 사무소에 가서 그곳에 있는 변호사 사무소 발행의 월간 뉴스에 의하여 한국에도 원폭피해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장인 산소에 가면서 시이나 변호사 사무소 발행의 뉴스에서 알게 된 합천군의 원폭피해자의 합천지부를 찾은 것이 나와 한국의 원폭피해자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오노데라 변호사와 시이나 변호사는 연결이 되어 있어 이것은 이외로 간단히 한국에 '반전 평화의 불'이 분화될 수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은 오노데라 변호사 사무소에 부회장과 이사 등 몇 분이 모여 평화의 탑 설계도까지 보여주며 '반전 평화의 불'을 지키면서 계속 불태워가는 규모가 큰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역시 분화는 어렵다, 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 해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중앙사무소에 가서 회장과 평화의 불의 분화에 대하여 상의했습니다.
평화의 탑이나 그 후의 관리는 태양회에서 하지만 서울의 토지는 손이 돌아가지 않으니까 이 토지를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는 상담을 하였습니다.


평화탑은 될 수 있는 한 사람이 잘 보이는 곳이 좋습니다. 사람의 눈에 닿지 않는 산중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안이 나왔지만 모두 사라지고 1년 후에 일본에 갔습니다.


돌아오기 전날, 야마시다씨와 식사를 하면서 분화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데, '반전 평화의 불'이 아니고 '반전 평화의 꽃'은 어떤가?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것 또한 원폭에 관계되었습니다.


이 반전 평화의 꽃 문주란은 니시무라씨를 통하여 한국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각 지부, 태평양전쟁유족회, 나눔의 집, 한국태양회의 각 지부 계 11개소에 분화되고 대만은 228협회등 7개소에 심어져 지금은 매년 흰 꽃을 피워 기후가 따뜻한 대만의 일부에는 손자 꽃까지 피어있다고 합니다.


반전 평화의 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평화의 불은 전혀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아이지현 사쿠라가오카교의 학생들이 한국피해자협회의 반전 평화의 불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 것을 듣고 사쿠라가오카교와 접촉을 하였습니다.


상당히 열심히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 학교를 찾아가보니 교정에 높이 3m, 폭이 60 정도의 석탑이 서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곳에 반전 평화의 불이 불타고 있습니다. 드디어 이 학교와 태양회는 결합 되여 이 학교 생도들이 한국에 여행 왔을 때 태양회는 거의 봉사에 가까운 감치 강습회 등을 했습니다.


이 학교가 반전 평화의 불을 가지고 온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평화의 탑을 태양회에서 건립하고 그 제막식은 2005년 11월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인지 이 학교 담당 책임자와 연락과 보고에 난점이 있어 몇 번이나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중 11월을 목표로 '아이지현 고교 70교에 연락을 한다'는 등의 문면이 보내져 고조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 더욱 성황을 이루기 위하여 10월에 문화제에 강연을 부탁받았습니다.


'한국의 피폭자의 실태'라는 제목으로 강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갔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아 도저히 11월에 반전 평화의 불을 가지고 올 상태는 아니고 태양회로서는 식순까지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2006년 11월의 반전 평화의 불을 한국에 분화하기 위해 도쿄 우에노의 평화의 불을 지키는 회, 아이지현의 사쿠라가오카교, 도쿄의 민단본부, 한국의 망향의 등산, 피폭자협회에 몇 번이나 갔을까요?
유감스럽지만 노력은 헛되고 말았습니다.


2005년 봄,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를 방문한 후 원폭피해자복지관에 갔습니다. 복지관 관장님과 만나 "이 복지관내에 반전 평화의 탑을 건립하고 싶다는 뜻과 '반전 평화'라고 쓴 것을 4~5장 가지고 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복지관의 직원의 총의로 한국은 반전의 두 글자는 필요없고 '평화화'가좋고, '평화의화' 중의 '의'자도 필요 없다고 하여 이날부터 '평화화'라는 문자의 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2004년부터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좋지 않아졌습니다.
교과서 문제, 야수쿠니 문제 등 그리고 드디어 일부에서 일본의 반전 평화의 불은 반드시 한국의 반전 평화의 불로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한일의 여러 가지 문제가 이러한 말까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한국 독자적인 평화의 불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하는 의견까지 나왔습니다.


이러한 소리가 강렬해지므로 소중한 것은 평화의 석탑이나 불이 아니고 평화의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한 평화의 붙이며, 평화의 탑입니다. 일본의 불에 집착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6년 5월 7일, 18년째의 합천지부의 야유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인사하는 가운데 금년에는 반드시 평화의 불을 합천에 점화하겠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평화의 붙은 태양회에서 채화한다는 방침이었습니다. 4년마다 행하고 있는 올림픽은 그리스에서 신비로운 옷을 입은 여성들이 산상에서 태양에서 채화한 불이 올림픽의 불로 되어 세계를 돕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합천의 심지부장님께 했습니다. 일본 황실의 근원은 다카마가하라이지만 한국인은 그것을 거짓이라고 합니다.


진실한 다카마가하라는 해인사의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심진태 지부장에게 말했더니 "아아, 그시다"고 하여 동행하였는데 그것은 oo대학의 캠퍼스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까이 있습니다.


성과 같이 큰 바위에 굵은 새끼줄을 둘러쳐놓아 너무나도 태고를 방불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태양에서 불을 채화한다고 해도 사람이 모여 불을 채화할 때 나오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여러 가지 상의한 끝에 일단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5월 6일이 바쁘게 지나가고 공교롭게도 긴 장마가 시작되어 7월로 접어들었습니다. 7월에 장마가 끝나면 태양에서 불을 채화하지 않으면 8월 6일에 맞지 않습니다.


미리 이 불을 보관할 램프를 이요석씨가 3개 구입, 점화봉은 최용복씨가 두개를 만들어 두 사람의 여자 회원이 신비롭게 장식하여 두고, 채화대는 추미숙씨가 구입해 두어 이제 점화하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비는 다 되어 있는데 좀처럼 태양이 빛을 비쳐주지 않습니다.


그 다음 다음날 일본의 우인에게서 전화가 와서 "오키나와에 원폭의 불이 있어 언제든지 분화해주겠다고 합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하여 급히 작은 램프와 두개의 카이로를 가지고 7월 31일 오키나와로 향하여 그 날 평화의 불을 램프와 두개의 카이로에 채화하였습니다.


8월 2일에 돌아와서 3일 태양열이 가장 높다고 하는 정오에 채화하자 합천에 점화된 한국 최초의 평화의 불은 일본의 원폭의 불과 태양의 불이 합해진 불입니다. 이 불은 한국 평화의 불로서 금후 평화화탑을 건립할 때 반드시 이불을 점화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급히 작은 램프와 두개의 카이로(불 담은 용기)를 가지고 7월 31일 오키나와로 향하여 그 날 평화의 불을 램프와 두개의 카이로에 채화하였습니다.


8월 2일에 돌아와서 3일 태양열이 가장 높다고 하는 정오에 채화하자 처음에 채화장소를 3.1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이냐 아니면 서울 88올림픽 때에 생긴 평화공원에서 채화하려고 했습니다.


시간은 '정오의 정, 묘 중의 묘'라고 합니다만 정중, 정오 12시의 태양이 제일 강하다고 하니까 정오 12시로 정했습니다만 단 하루뿐이어서 그렇게 고집에만 집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확실하게 채화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옥상에서 채화.


아침부터 맑은 하늘, 이 정도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오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겨우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고 좋아하면 어느새 다른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고 이러는 동안 점점 시간은 흘러가고 3시가지나 이제는 틀렸구나 하고 체념하고 있던 중, 겨우 또다시 겨우 5분 동안 나타난 태양에 의하여 불이 붙어 태양으로부터 채화가 성공했고 얼른 준비해 둔 램프에 점화해 놓았습니다.


합천에 점화된 한국 최초의 평화의 불은 언젠가 부처님의 생명을 가진 민족으로 되어 주길 바랍니다. 언젠가 한국과 일본이 부서지지 않는 우호국으로 되어주길 바랍니다. 언젠가 모든 인류의 사람들이 태양과 같이 밝고 따뜻한 사회로 되어주길 바라면서 3개의 불이 하나로 된 것입니다.


다음날 일본태양회를 대표하여 고바야시 가즈마츠씨가 방한, 먼저 인천공항에 도착, 태양회 서울지부 부인 유지들이 공항까지 마중, 아름다운 꽃다발로 환영을 받은 후, 그곳에서 바로 금포공항으로 이동하여 김해 공항에 도착하자 여기서도 부산 태양회 부인부들과 여자부가 꽃다발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30명 정도의 환영회가 있었습니다.
자연 음식 즉 산속의 웰빙 식당으로 같이 온 부인들이 좀처럼 회식장에 나타나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모두 아름다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고바야시씨를 노래와 춤으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더욱 그 이튿날 18년 동안 태양회는 합천의 원폭피해자를 원조해 왔는데 야유회와 추도회에 여러 내빈들께서 참석하시지만 국회의원이나 도의원, 국의원등 7명이 오셨습니다. 18년 중에 제일 성대한 원폭피해자 추도회 및 평화의 화 점화식이 되었습니다.


만약 가능한 한 이 평화화탑, 평화의 불을 10개소에 건립하고 싶어 지금 고려중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태양회는 사회의 평화를 위하여 또는 조금이나마 공헌한 흔적을 남기겠지요.


여러분! 앞으로는 잘 부탁드립니다.


대단히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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