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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8호)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생각하다

관리자 2018-10-20 (토) 07:35 5년전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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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 세츠코 여사 연설장면

작년 12월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단체로 결정되었다. ICAN의 수상은 때에 맞는 시의적절한 평화상이라고 생각한다. ICAN은 핵무기 금지조약의 준수와 완전한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계시민사회연맹 단체로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평화상 시상식때의 보도는 ICAN의 베아트리스 핀 사무국장의 연설보다 ICAN 활동가인 피폭자 사로 세츠코 여사의 연설이 3배정도 더 길게 게재되어 있다.

사로 세츠코 여사의 얼굴을 신문에서 보았을 때, 어디서 본 듯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2014년, 즉 4년 전에 동경신문에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기사를 보면 원폭투하를 명령한 트루먼 대통령의 손자, 다니엘 트루먼 씨가 사로 세츠코 여사를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는 트루먼 대통령의 기념관 「리틀 화이트하우스」에 초청하여 환담하는 사진을 볼 수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손자, 다니엘 씨가 「우리들이 여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자 세츠코 여사는 「피폭자의 사명은 이 궁극의 악의 위협을 세계에 경고하는 일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고 말했다 한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사로 세츠코 여사를 플로리다 주의 다니엘 트루먼이  초청했다는 것은 그녀가 나름대로 원폭피폭자로서 알려진 존재일 것이다.
즉 그때부터 세츠코 여사는 국제 NGO, 「핵무기폐기국제캠페인(ICAN)」의 중심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로 세츠코 여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ICAN의 노벨 평화상 수상의 뒤에는 일본 원폭피폭자들의 장기간에 걸친 견실한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기술 한 것은 정말 깊은 감격을 느꼈다.


  또한 세츠코 여사의 평화상 수상식 연설이 좋았다. 조금 인용해 보면  「우리들은 피해자임을 만족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강대국이라는 나라가 우리들의 핵의 황혼으로부터 밤중으로 무모하게 몰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두려움 속에서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일어섰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핵무기와 인류는 공존 할 수 없다」고 여기서 「일어섰습니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는 여사의 나이가 85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말을 잘 알 수 있었고 설득력도 있다.


대체로 학식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부분을 자주 언급하는데 논리는 정연하지만 문장은 딱딱하다. 그러나 이 여사는 쉬운 문장으로 이해가 쉬우며 설득력 있게 말을 한다.
85세라면 대부분 허리, 무릎이 아프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여사는 시종 웃고 있다. 신체가 젊고 마음도 젊고, 머리도 젊은 것일까?
「바다 건너 피폭자들」(平野伸人著(히라노 노부토)) 책에 의하면, 캐나다의 피폭자는 34명이라고 한다. 그것은 2009년에 기록이기 때문에 지금은 더 인원수가 적을 것이다.
이렇게 피폭자가 적은 가운데, 게다가 85세의 나이에 「일어섰습니다.」라는 강한 의지의 표현과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일본의 피폭자가 뒤에서 밀어주지 않았다면 ICAN의 평화상 수상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증거를 사로 세츠코 여사가 입증하고 있는데, 일본 원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원폭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약 70년 전의 일이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같은 반에 조선인 마츠하라(松原) 군이 있었다. 항상 험한 표정으로 싸움을 잘하고 또 싸움에 강하여 미움을 받았다고나 할까 가급적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나와는 친구 사이였다.
  그 마츠하라 군이
  「두 번 다시 허락하지 않는다 원폭을, 두 번 다시 허락하지 않는다 원폭을」이라는 노래를 몇 번이나 불렀다. 전쟁이 끝나고 6년이 지난 시기에 미야기 현의 작은 시골 마을의 조선인 소년이 왜 원폭의 노래를 알고 불렀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이상하다.


원폭에 조금이라도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인물이 있다. 「아버지를 돌려다오. 어머니를 돌려다오.」라는 유명한 시를 지은 토게 산키치(峠三吉), 이른바 원폭의 시인이다. 토게 산키치는 원폭이 투하되고 8년 후에 사망했지만, 자신의 죽음은 원폭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시를 쓸 수 있었는가?
  그것은 순식간에 수만 명을 죽인 큰 불행, 지옥 같은 세계를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의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 그리고 원폭의 비참함, 그에 대한 저항, 그리고 또 생길지도 모른다는 전쟁의 위기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나가사키의 종」 「로사리오의 종」 「이 아이를 남겨두고」 등 많은 책을 남긴 저자 나가이 타카시(永井隆)는 원폭 투하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분의 책을 읽고 감격한 사토 하치로가 시를 쓰고 고세키 유지가 곡을 붙여 완성한 노래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대중가요는 원폭 투하 6년째에 발표되어 일본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대중가요가 되었다. 원폭에 대한 문학인의 힘도 크게 발휘된 것이다.
아가와 히로유키, 야마오카 소하치, 오타 요코,  미시마 유키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오에 켄자부로 등 명망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여를 하였다.  화가, 유명한 여배우의 낭독, 또한 수십만 마리의 종이학을 접어 유엔에 보내기도 하고. 수십만 명의 핵 반대 명단을 보낸다. 매년 히로시마, 나가사키 시장의 핵 폐기를 세계를 향하여 주장하고, 각 학교와 학생들이 모여 반전 평화 집회 등등, 총리가 처음 히로시마에 온 것이 1971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총리이지만, 이후 정치권의 거물들이 매년 오게 되었다. 。


 이러한 반전 평화와 핵에 대한 선언, 그리고 8월이 되면 전국에서 집회가 열린다.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성실하고 순수한 노력과 행동이 인정받았을 것이다.
노벨상은 6개 부문중 5개의 부문은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데, 평화상만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그 노벨평화상위원회가 일본 피폭자의 꾸준한 노력을 인정한 것이다.
작년 노벨 평화상을 봤을 때, 왜 한국인 피폭자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살짝 일어났다.
일본은 피폭자를 격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피폭자를 이끌어 가도록 선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한국이 왜 일본 못지않은 노력과 정진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마저 생긴다. 다만, 한국은 일본의 피폭자에 비해 모든 면에서 너무나 차이가 많고 여러 가지 조건이 나빴다.


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피폭자 수가 203명이며, 한국에서의 공식 발표한 것은 1965년이다. 원폭 투하로부터 2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피폭자 수를 밝힌 것이다. 최종적인 피폭자의 총수는 십만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피폭 20년 만에 한국 정부 발표한 것은 겨우 203명이라는 것은 한국의 피폭자가 무시되고 방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 해 보면, 1945년 전쟁이 끝날 때 일본에 230만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한 현에 몇 명의 한국인이 있었을까? 특히 히로시마는 도쿄가 제일 수도라면 히로시마는 군사 시설로는 일본 제2군이 있던 곳으로, 우지나 항구에서 동남아시아로 출항하는 병사를 위해 여러 가지 허드렛일이 있어, 히로시마에 8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우지나 항구 해변이나 텐마 마을 강가에는 한국인 판잣집이 줄줄이 붙어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히로시마시만 해도 피폭자 총수가 7만 명. 사망자 3만5천명, 귀국자는 3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은 203명으로 발표한 지 한 달 후에 한국 적십자사가 462명으로 발표, 그 2 년 후에 드디어 '한국원폭피폭자 원호협회 "가 생겨, 1,857명이 회원으로 등록되었다.
여기에 「원호」라는 두 글자가 들어가 있지만 아무런 도움도 없고 오히려 회원이 되기 위해 사진을 찍고 그것을 본부에 보낼 우편비용 등 여러 가지 비용이 들지만 아무런 대책도 마련해 주지 않는다는 불만도 나와 후에 원호라는 두 글자를 삭제했다.


 1973년에 출판 된 「원폭 문학사」에 「조선인 피폭자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피폭자들은 한국에서 매우 차별을 받고 있다. 너희들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순수하지 않다.」라는 문장이 나와 있다. 이 문장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순수하지 않다’라는 말을 한국에 와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편 한국 피폭자에 대하여 신문과 월간지 등에서 국가, 사회에 호소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원폭 투하 20년째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의 원폭 피해자를 찾아」

  「조선인 피폭자 문제」
  「히로시마, 조선」
  「한국 거주 피폭자의 실태」
  「고발하는 피폭 조선인」
  「피폭 조선인의 분노와 슬픔」
  이것은 히로시마 시장을 두 번 역임한 히라오카 타카시(平岡敬) 씨이다.
  그리고 히라오카 씨는 한국인 피폭자에 대해 쓴 글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 외, 다케나카 로우(竹中労) 씨, 카마다 사다오(鎌田定夫) 씨 등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기사를 많이 냈다. 한국 피폭자에 대한 보고서 및 출판 서적을  보면 1960년부터 2000년까지 40년간 300개에 가깝다.
특징은 약 95%가 일본인이 쓴 글이고 겨우 5% 정도가 한국인이 썼다.


이러한 한국 피폭자의 역사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나 느낀 점 중의 하나는 한국 피폭자의 현상을 발견하고 조사하고 사회에 호소 한 것은 압도적으로 일본인이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호소 한 곳이 한국이 아니고 일본이어서 한국인, 한국 피폭자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셋째로, 한국인의 일부도 호소를 했다, 그토록 엄청난 일을 만약 한국에서 한글로 호소했으면 어땠을까? 일본 언론인, 문화인의 힘이 한층 더 한국 피폭자를 위하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넷째로, 한국의 정치적 상황, 사회적 상황이다. 일본이 전쟁에 패한 것은 바로 한국의 독립이며, 피폭자를 포함한 한국인이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 수는 180만 명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시대는 피폭자도 자신의 몸 상태가 나쁜 것이 피폭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시대이다. 또한 1965년에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과 한국의 국가 간에 과거의 역사는 모두 해결하게 되어 피폭자들이 만약 일본이나 미국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려면 개인적으로 요구하는 수밖에 없어졌다。

1967년 한국피폭자협회가 발족되었지만 치료는 개인적으로 해야 하였다. 원폭 치료를 위해 일본에 밀입국했다가 잡힌 손귀달(孫貴達) 씨가 징역 6개월, 집행 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국에 한국인 피폭자가 있다는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3년 후에 손자 손진두(孫振斗) 씨가 밀입국하여 이번에는 징역 10개월의 판결을 받았다.
법적으로 보면 이 판결은 타당하지만, 본인은 참을 수없는 억울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일본의 양심적인 유지들이 피폭자들을 원호를 해 준 것만으로 약간 구제받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 후 1979년에 일본과 한국에서 한국 피폭자 지원 동의서가 오가고 한국 피폭자가 1981년부터 1986년까지 349명이 일본에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1987년부터 한국 내에서 치료 대책이 발표되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피폭자에 대하여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되었고, 한국 피폭자는 원폭병에 대한 안전권내에 들어갔다는 자신감이 있어 도일 치료를 중단 한 것이겠지만 결국 원폭 병원마저 세우지 못했다.
이 치료 중단을 걱정하여 나가사키 대학의 카마다 교수 등 수십 명이 조사단을 만들어 8일간 한국을 돌아본 것이다.
이 조사단에 응하여 피폭자 96명이 피폭 증언을 하고 있다. 일본 피폭자의 체험기의 10분의 1 정도이지만 그래도 피폭자의 고통과 비애를 알 수 있었다.
  인상에 남은 글은
  「일본의 원폭 치료병원은 모두 친절했다」
  「병원에 입원하여 몸이 좋아졌지만, 돌아와서 나빠졌다. 또 가고 싶다」
  「일본 갈 때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갔기때문에 돌아와도 아무것도 없다.」
  「일본에서 일한 돈을 저금했는데 그 돈을 돌려주시오」
  「약값도 없이 더 이상 살 수 없다.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죽여 달라.」 
  「잘 오셨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십년이에요. 이렇게 늦게 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요?」
이것이 왜 한글로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사람들 이 예를 들어 도일 치료를 중단하면서 한국이 일본처럼 피폭자의 생활을 보장하고 생활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면, 혹은 일본인처럼 반전, 평화, 핵의 무서움, 슬픔을 세계에 호소하였다면 이번 ICAN이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 그 뒤에는 일본과 한국의 피폭자들의 오랜 시간에 걸친 피나는 노력과 활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 무리한 상상이지만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초대 회장 신영수(辛泳洙) 씨는 "한국 피폭자야말로 사회를 향해, 일본 정부를 향해, 세계를 향해 호소 할 권리가 있는데 왜 울지 않는가? 왜 안부르느냐"고 말하고 있다.

사로 세츠코 씨의 평화상 시상식의 연설을 인용하였습니다만,
"우리는 일어섰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핵무기와 인류는 공존 할 수 없다. 고"
  이번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ICAN은 2007년 호주에서 결성된 일본의 피단협(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 처음에 일본 피폭자의 오랫동안의 노력과 흔들림 없는 핵 폐기의 호소, 이런 것이 있었기에 수상 할 수 있었고 일본과 공동 수상이다. 그래서 사로 세츠코 씨가 시상식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세계에 핵 폐기의 강연을 한 것이다.


만약, 만약이다. 적어도 한국 피폭자도 ICAN이 수십 년 전이 아니라도 일본에 이어 피폭자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다시는 우리 같은 불행한 사람을 세상에 만들지 말자고 목소리를 모았다면 2년 전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에 왔을 때 일본의 위령지에서 불과 3분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도 서지 않았을까?
  피폭 문제는 국가 간의 문제이기도 하여 상당한 복잡한 문제가 많아 피폭자의 근본적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 그 어려운 한국의 피폭자들은 평균 연령 83세가 된 지금, 무엇을 원하고 우리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볼 때 정말 안타까운 마음만 남는다.


최근 106세까지 현역을 지낸 일본의 세이로가 병원의 히노하라 시게아키 의사(지금은 돌아가셨음) 이 분은 정말 병자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다. (이분은 1970년 일본의 요도 호 납치 사건 때 그 요도 호에 타고 있어 김포 공항에서 3박 4일 동안 구금당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선생님에게 입원 한 초로의 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부인은 남편이 다른 여자가 생겼기 때문에 몰래 입원하여, 남편을 원망하며 괴로움과 질병의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 히노하라 선생님의 인품에 이끌려 자신의 심경을 털어놨다. “원한을 가진 채로 죽는 사람과 맑은 마음으로 죽는 사람의 죽음의 무게가 달라진다. 남편이 밉겠지만 용서 해주라.” 라는 선생님의 말에 부인은 남편을 불러 몰래 입원 한 것을 사과하자 남편은 나야말로 사과해야 한다며 손을 잡고 두 사람은 엉엉 울었다한다.

히노하라 박사는 말한다.
"그녀는 용서함으로써 마음이 구제되었다. 용서한다는 것은 영혼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라고.
"이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
그 이후부터 부인의 얼굴은 항상 밝은 상태였다고 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피폭 당한 많은 사람들은 미국을 원망하고, 일본 군부도 원망했다. 그러나 피폭자들의 원한을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전쟁을 해서는 안 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평화를 호소’하였을 때, 분노도 괴로움도 사라져 갔다. 인간은 그런 것이다.
한국의 피폭자 여러분도 앞으로 더 밝은 인생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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