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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6호 207년 5월] 이왕조의 비애(2)

관리자 2018-01-20 (토) 09:31 6년전 1837  

-나라는 망해도 강산은 있다

이왕조의 비애(2)


관장 高橋公純

이은과 민갑완의 혼약

전호에서 이왕조 28대 왕으로 될 14세의 은전하가 일본에 강제로 유학을 권유받아 어머니와 만나지 못한 채 4년 후 어머니의 사안조차 볼 수 없었던 모자의 이별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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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


그로부터 9년 후 1920년 4월, 은 전하는 일본 황족인 나시노모토 미야모리마사오우(梨本宮守正王)의 장녀 방자(方子)와 정략적인 약혼을 하였다. 이방자 황태자비에 대해서는 한국 사람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은 전하 사후 이방자 여사는 만년에 농아와 소아마비아동을 위한 명휘원과 자혜학교를 세워 정박아, 지체부자유자들의 교육과 자선사업에 헌신하였으며 국민훈장 모란장, 소파상, 서울시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1990년 4월 낙선재에서 서거하셨다.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 「지나온 세월」에는 이런 일문이 있다. 「그 행복한 가운데 왠지 때때로 민희 님의 일이 마음에 떠올랐다...전하가 조국을 떠나와 처음부터 서신 왕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두 번 다시 대면도 없는 채 지나가고 있습니다...조선의 습관으로는 한번 허혼자로 되신 분은 일생 독신으로 끝내야만 하는 법이라 젊고 아름다운 시절을 허무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전하와 민희 님과 그리고 나와 누가 만든 운명이 아니라도 나에게는 죄송하게 생각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은 전하와 결혼했을 때의 신혼생활 중의 감상으로 쓰고 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하여 「젊고 아름다운 시절을 허무하게 지냈을...」이라고 한 것과 같이 전하와 방자 님의 결혼에 누군가가 희생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희생이 된 사람은 누구인가? 여기에는 민희 님이라고 한다. 민희 님이란 누구일까? 방자 여사는 이름은 알고 있었겠지만 자세하게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면 역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07년 3월 12일, 조선에서 은 세자의 비를 선택하는 간택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3명이 선택되었고 최종적으로 당시 북경재주 조선대사 민영돈의 장녀 갑완이 은 세자의 비로 선택된 것이다. 그때 은 세자의 어머니 엄비의 손에 이끌려 장래의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났다 한다. 그러나 은 세자도 나이가 10세인지라 자유분방하게 의자 위를 뛰어 다니며 놀고 있었다 한다. 이또 히로부미가 은 세자를 일본으로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데려가기 9개월 전의 일로서, 10세의 세자가 앞으로의 운명을 알 수도 없었다.    그동안 대한제국의 풍운은 급격하게 기울어지기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회의에 고종은 일본의 횡폭함을 호소하기 위해 밀서를 써서 3명을 파견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호소는 허무하게 무산되었고 일본이 알게 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고종은 양위를 박탈당하여 8월 27일  순종이 27대 황제가 되고 은 전하는 정식으로 황태자가 되었다.


은 전하가 12월 5일 일본으로 가고 15일 후인 12월 20일, 27대 황제의 유모 문상궁이 민가를 방문하여、갑완에게 약혼반지를 보내온 것이다. 만약 조선의 정세가 평온하였다면, 한 달 후 정도로 은 전하와 민갑완은 혼인을 하였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친왕의 아내가 되었을 갑완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은 전하가 일본으로 갔고 일본은 은 전하를 고국으로 돌려보낼 의지는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1년이 지나고 그 이듬해 이또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암살당하고 일본은 그 책임을 대한제국에 물어 이듬해 한국은 일본에 합병되고 만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의 약혼은 어떻게 되는가?

1년이 지나고 갑완이 15세가 되었을 때、은 전하의 어머니이신 엄비가 급서하고 4년 만에 남편이 될 은 전하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제 훌륭한 숙녀가 된 갑완은 한 번이라도 만나 뵙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 전하는 눈물 속에 있었고 조선사회는 비통 속에 있다. 만날 수도 없었고 한 마디 말도 없이 약혼자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갑완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생활을 7년 보냈다. 23세가 된 갑완은 생각지도 않은 일을 알게 되었다. 약혼자 이 왕세자가 학업을 끝내고 서울에 잠시 돌아온다고 한다. 1918년 10월 1일이다. 이번에야말로 자기에게 연락이 있을 것이라고 기다렸다. 반달이 지난도 갑완에게 한마디 연락도 없이 약혼자는 또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일시 귀국하였을 때、갑완의 아버지는 왕세자에게 「간택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한다.
「기억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는데、이 말을 옆에 있던 일본의 현관(顕官)이 듣고 말았고 일본에서 방자 여사와 약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미 나라를 잃어버린 세자에게 자기 인생을 자기의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6년 8월 1일 신문에 「이 왕세자의 경사」로서 은과 방자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방자는 자신의 결혼을 부모에게 들은 것이 아니고 신문을 보고 알았다 한다.

일본은 은 전하가 이미 조선에서 약혼한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뒤늦게 약혼한 사실을 알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어 급속도로 진전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갑완의 인생도 갑자기 폭풍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은 전하가 일본에 돌아간 이틀 후、궁정에서 민가에 3명의 고위급 궁녀가 왔다. 용건은 「은 왕자와 약혼 해소를 알리고, 그래서 약혼반지를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랐고, 10년 후의 일가의 불행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친다. 만약、약혼해소에 동의하면 갑완은 일생 결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조선의 관습은 형이나 누나가 결혼하지 않으면 동생들은 결혼할 수 없다. 4명의 자녀들의 결혼은 절망적이 되는 것이다. 영국 공사를 지낼 정도의 명가이다. 집안은 벌집을 건드린 듯 난리가 났다.


궁정에서는 약혼해소 이유가 세자가 일본의 왕비와 결혼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말하고, 그래서 민가도 타가와 결혼을 서둘게 하고, 만약 아무도 없다면 궁정이 알선해 주겠다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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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갑완 여사


그러면 반지를 되돌려 줄 테니까 수령서를 달라고 하니 준다, 못 준다 하는 큰 소동이 일어나고 궁정에서 가지고 온 수령서에 도장이 없어 또 분쟁이 일어난다. 결국 인감이 있는 수령서를 가지고 오는데, 그것을 전해 주었을 때 갑완은 참아왔던 눈물을 펑펑 쏟았고 어머니도 울고 궁녀도 울고 일가들의 우는 소리가 외부까지 들렸다.


그 후 아버지는 궁정에 불려갔다. 대신 들 앞에서 한 장의 서약서가 준비되어 있었다.
‘당신 딸을 연내에 타가로 시집을 보내지 않을 때는 아버지는 중죄로 문책해도 좋다’는 서약서로 즉 오늘부터 1년 안에 갑완이를 결혼시키지 않으면 어떤 죄라도 달게 받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이다.
어쩌면 이렇게 도리에 어긋난 불합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첫째, 자기 딸을 150명의 후보 중에 간택한 것은 궁정이 아닌가? 십수년 동안 딸을 기다리게 해놓고 이제 와서 결혼을 파기하고、연내에 다른 사람과 결혼시키지 않으면 어떤 중죄라도 달게 받겠다고 하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한다.


이런 불합리하고 무법난제가 있어도 좋은 것인가?
탄식하고 분개하고 통곡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주량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아무래도 딸은 1년 안에 결혼은 안할 것이다. 결혼하지 않으면 자신도 딸도 국가의 죄인이 된다. 이런 고통스러운 괴로움, 쓰라림, 분출할 수 없는 분노를 분출할 수도 없어 매일같이 술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엎친데 덥친격으로 손녀를 너무나도 아끼든 조모께서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반년 정도 지난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집에 도착하여 쓰러지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누워만 계신다. 그리고 12월 3일 56세의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궁지에 몰릴수록 가슴의 분노의 불꽃이 불타올라 죽고 만다. 「화병」이었다고 딸 영순은 말하고 있다. 갑완은 조모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것은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사이에 26대 고종 황제께서 붕어하셨다. 이런 관계로 은 전하와 방자의 결혼식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장례식 때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갑완의 입장에서는 연내에 결혼하지 않으면 문책해도 좋다는 서약서는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지만, 은 전하가 결혼하여 한국에 오셨을 때 만약 옛날 약혼자가 한국에 있다고 한다면 일본정부로서는 입장이 곤란해지니까 반드시 박해를 가해 올 것이다. 갑완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그 와중에 갑완은 중병에 걸렸다. 이미 아버지도 안 계시고, 재산도 없고, 의료비를 위하여 민가의 넓은 집을 팔기도 했지만, 갑완의 위험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결국 갑완은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해외로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많은 불행한 사람들을 배출하고, 많은 사람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활발하고 명랑하고 총명한 갑완은 그 후부터 말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이제 겨우 한국은 자유 독립국가로 되었을 때 갑완의 나이가 49세가 되어 있었다.

청춘을 돌려다오!!
나의 행복을 돌려다오!!
나에게 불행을 준 자들이여
내가 만족할 때까지 속죄하라.!!

무슨 말을 해도 자유이지만 행복했어야 했던 청춘을 그 누구도 돌려주지 않는다.
갑완은 그 후 조국으로 돌아와 68세 때에 식도암에 걸렸다. 4년 동안 암으로 고생하다가 72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갑완의 인생은 무엇을 위하여 있었던 것일까?
실로 나라가 멸망한다고 하는 깊고 깊은 슬픔보다 더한 슬픔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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