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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5호 2017년 2월] 한국에서 원폭유품 전시회를 할 수 있다면

관리자 2018-01-19 (금) 08:48 6년전 1812  


한국에서 원폭유품 전시회를 할 수 있다면

관장 고교목남(高橋睦男)


제가 처음 히로시마의 원폭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30세를 지날 무렵 히로시마에 일주일간 출장을 가게 되었다. 약간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두 곳을 둘러보았는데, 에다도(江田島)와 원폭기념관이었다.


신간센을 타고 신문과 잡지를 읽고 있는데 문득 옛날 신문에서 읽었던 「원폭 화학의 힘은 70년 동안 초목이 살지 못한다.」고 하던 기억이 창밖을 볼 때마다 떠오른다. ‘정말일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반신반의하는 동안에 신간센은 히로시마 역 홈에 도착했다.


이게 웬일인가? 나는 일순 내 눈을 의심했다. 히로시마 역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초록 잎으로 반짝이는 나무들이 ‘나를 봐 주세요!!’하듯 미소 지으며 흔들리고 있는 나뭇가지를 보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 초록색이다.」라고 탄성을 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 같았지만, 그때는 정말 걱정을 많이 했기 때문에, 녹색을 자랑하는 나무들을 보니 감동이 각별했는지도 모른다.

「편안히 잠드십시오. 과오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비석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흠∼, 일본사람답군. 좋은 말이다.’ 이 글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원폭자료관에 들어가기 전에 한 순간에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 영령들에 대하여 ‘편안하게 잠드십시오. 일본사람은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과오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은 좋은 말인 것 같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자료관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시관에 들어간 그 순간 나는 무거운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원폭!!!! 이렇게도 처참하게 죽었는가? 이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 이렇게 처참하게 죽었는데 ’편안하게 잠드십시오.‘라고? 편안히 잠들 수가 없지 않은가?’ 슬픈 마음보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옆에서 철없는 여학생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다카하시 가즈미(高橋和巳)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사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잘못이라고? 잘못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것인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것인가?...이런 모든 것이 과연 국가적인 범죄가 아니고 과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생에서 「진(進:나아감)」, 「퇴(退:물러남)」에 있어서, 인생의 나아갈 때는다른 사람에 의해 나아가는 경우가 많지만(즉 타의에 의해), 물러날 때는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주저하지 않고 결단하지 않으면 그 영광은 흙투성이로 된다. 일본은 국가적인 범죄가 쌓여 원폭투하라는 비극을 낳았다. 국가적인 지도자들이 「퇴(退)」의 시기를 놓친 것이다.


만약 한국에 있어서 일본 원폭유품의 전시회가 실현된다면, 일본이 범한 그 과오가 무언으로 나타남과 동시에 그 과오에 의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살아야만 했던 그 당시의 조선인의 슬픔과 괴로움까지도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우정과 단결

초등학교 2학년 때라고 생각된다. 선생님이 「내일부터 점심시간에 우유를 줄 테니까 컵을 가지고 오도록 하렴.」 하셨다. 마을 어린이들은 컵을 가지고 왔지만 우리 같은 산골 아이들은 컵을 본 적도 없어서 밥그릇을 가지고 갔다. 지금 생각하면 미국에서 받은 우유인 것 같다. 맥아더 장군이 일본을 통치한 기간이 2천일, 즉 5년 8개월 통치 기간은 원폭에 관한 기사를 쓰지도 못했고, 호소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분유까지 미국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이 원폭의 무서운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52년 8월 아사히 그래프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특집기사(사진)를 발표한 이후라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7년 후의 일이고, 한국인 피폭자는 대부분 모국으로 돌아간 후의 일이어서, 원폭의 실태를 일본인까지도 몰랐기 때문에 한국 사람은 더더욱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인 피폭자의 제1의 불행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지만 그것이 원폭병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 다음해에 휴전을 했지만 준전시상태라 한국정부는 국가예산의 30% 전후를 군사비로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고‘ 전쟁 피해 복구에 여념이 없어 사회복지는 여유가 없었다. 이런 국가의 사정도 한국피폭자로 보아 불운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피폭의 역사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한국에도 피폭자가 있지만 일본의 피폭자에 비해 그 비참한 실태를 보고하거나 고발한 사람은 압도적으로 일본사람이 많았고, 그 중에 한국인도 약간 있었지만 그것도 모두 일본어로 일본에서 고발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고발한다 해도 정부나 사회단체의 관심도 적었고 호응도 하지 않으니까 고발해도 별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이 일본어로 일본에서 호소하는 것이었다.


피폭 40년 정도 지나서야 한일 양 정부가 합의하여 피폭자가 일본으로 가서 의료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언제부터인지 그것마저도 그만두게 되었다. 한국 피폭자는 이와 같이 사회적, 정치적인 불운도 있다. 저는 처음에 한국 피폭자가 모두 합천에 있다고 생각해서 오랫동안 합천에만 갔었고, 그 당시 합천지부장 안영천 씨는 경찰관을 25년 근무한 후 정년퇴직한 사람으로 근실한 사람이었다.


저는 안지부장에게 「일본의 신뢰와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본을 비판하는 것보다 일본처럼 함께 반전평화를 세상에 호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겸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현실이지요.」
「무엇이 현실입니까?」
「보시면 알겠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대부분 학교에 가지도 못했고 반전평화라는 고급스런 말은 못합니다.

또한 조직력도, 돈도 없으니까 홍보물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일본과 같이 할 수 없지요. 같은 피폭자이면서 왜 이렇게까지 다른 것인지 단지 일본이 부러울 뿐입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것이 한국피폭자의 실태이고 본심이 아닐까. 이렇게 지원도 없이 평균연령이 82세가 되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다. 한국피폭자에게 「행복」한 날은 얼마나 있었을까? 정말 좋았다고 느낄만한 날이 과연 며칠이나 있었을까?


만약에 ‘원폭유품 전시회’가 한국에서 개최된다면 한국에도 일본 다음으로 10만 명 가까운 피폭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80세가 지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서로 이해가 되면 일본 피폭자와 연대도 깊어질지 모른다. 옛날에는 한국의 피폭자가 일본을 비판하고 일본에 불평과 불만, 일본에 대한 부러움, 일본에 대하여 요구사항을 많이 들어 왔지만, 이제는 그러한 일들이 끝나려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원폭 유품 앞에서 힘껏 큰 소리로 반전과 평화를 호소해보면 어떨까? 일본의 피폭자와 한국의 피폭자의 마음이 연결되어 우정과 단결이 반전 평화에 보다 강한 힘으로 되어 더욱 피폭자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는 무대로 되지 않을까?

  심수관(沈壽官)을 보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악명 높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반도를 침략한 전쟁 중에 「남원성(南原城)」의 격전이 있다. 이 싸움에 참전하고 있던 구주의 시마츠(島津)세력이 전투가 끝났을 때, 80명의 도공(陶工)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일본은 토기뿐이기 때문에 유약(釉藥)을 바른 도자기에 광택을 내고 또 꽃이나 새의 그림을 그린 도기는 현대의 다이야몬드 정도의 가치가 있었고, 일본은 그 높은 기술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현 가고시마현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거주하고 있는 심(沈)씨에게 그 지역의 영주인 시마츠가(島津家)로부터 「도기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만들어서 헌상한 일품이 지금도 심가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것은 시로몬(白薩摩)과 구로몬(黒薩摩)의 둘 중의 시로몬(白薩摩)으로서 황유백색의 일품 초대 심가의 비장품, 가격은 정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 그릇은 「히바카리테(火計手)」, 「히바카리의 차완(火借りの茶碗)」이라고 한다. 즉, 흙이나 기구는 조선의 것이지만 불만은 일본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붙은 것 같다.


1966년에 14대 심수관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에 초청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남원성의 지도를 펼쳐놓고 심 씨 일족이 붙잡혀간 곳을 알려 주었고 또 막걸리를 대접하였다 한다.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아 한국과 일본에서 심수관의 이름은 확실히 남게 되었다.

1998년 8월, 심수관 400년 축제가 있으니까 카고시마에 꼭 와 달라는 지인의 초대장이 왔다. 저는 유감스럽게도 갈 수가 없었지만 그 상황을 TV에서 보게 되었다. 작은 배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통을 육지에 내려놓았다. 그 통속에는 한국에서 점화된 불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초대 심가(沈家)가 처음으로 일본에서 도기를 만들 때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지만 불은 없었다. 불을 일본에서 빌렸다. 그런 관계로 「불을 빌린 차완」이 남은 것이다. 지금부터는 불도 빌리지 않겠다는 뜻에서 한국에서 불을 운반해 온 것이라 한다. 4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 처음으로 한국의 기술, 한국의 기구, 한국의 불로 한국 전통의 도기가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불이 한일 우호의 불로 된 것이다.


그런 남원성의 격전에 지지 않는 것이 1945년 6월의 오끼나와 전이다. 당시 오끼나와의 인구는 60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 4분의 1이 사망했다. 결국 일본 수비대의 32군은 마무니(摩文仁)에 쫓겨 가서 거기서 우도(牛島) 군사령관이 자결함으로서 전쟁은 끝났다. 이 마무니에서 택시로 5분 정도 가면 「평화」라는 간판의 문자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것은 피폭 다음으로 비참한 인간의 마지막을 말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도쿄를 지나 카나가와 현에 가보면 「평화」라는 이름의 간판이 아마 일본에서 제일 많을 것이다. 「평화상점가」 「평화약국」 「평화병원」 「평화탕」, 이렇게 평화가 달린 간판은 130개가 넘는다고 한다.


저는 2006년 합천에 평화탑을 세우고 평화의 불을 점화했을 때, 한국에는 얼마나 평화기관, 평화의 불이 있는가를 조사해 보았다. 평화에 대한 기관, 책, 연구소, 협회가 일본이 훨씬 더 많았고, 그 평화사상도 일본이 더 진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신선한 아침의 나라」이다. 이 이름이 나타내는 것과 같이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그 옛날에는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여유로웠고 문화, 교양이 높았고 평화적인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근대의 평화에 관한 것은 일본이 일보 더 진보된 요소는 원폭의 투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어진다.


일본은 ‘두 번 다시 전쟁은 하지마라, 핵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고 호소하고 있는데 그것은 피폭국이기에 세계에 핵이 없는 평화를 호소하고 평화에 관한 것이 많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여러 가지 불운 등이 겹쳐서, 사죄, 배상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은 그대로 하고, 한국의 피폭자 여러분도 제일 무서운 공포와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이기에 자신과 같은 사람이 세상을 향하여 두 번 다시 만들지 말자는 반전과 평화를 호소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세계를 향하여 강하게 호소하는 그 장소는 한국에 일본 원폭 유품이 전시된 그 장소가 제일 적합하고 마지막 장소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는 원폭의 불이 평화의 불로 인식되어 20여 개소에서 365일 동안 계속 불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평화의 불은 피폭자들이 한국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평화의 불을 만들어, 평화를 원하는 자신들의 마음을 불에 기탁하여 한국평화의 상징으로 점화해 보면 어떨까?

 다시 심수관의 이야기로 돌아가는데, 1966년, 심 씨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했다.

「한국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36년의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말 그렇다. 그래도 너무 지나치게 말하면 그 심정은 이미 역행하고 있다. 만약 새로운 한국 국가를 위해서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너무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감성이 풍부한 심씨는 단상에서 절규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서울대생들이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노래를 합창했다 한다.

 

「미남은 아니지만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드디어 이 노래가 대 합창으로 되어 강당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알아요 알아요 그 마음을, 우리들도 같아요」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이들이 심씨가 말하고 싶은 마음을 노래로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원폭 피해자도 몸은 늙어가지만 정신까지는 늙지 않을 것이다. 아직 젊은마음이 남아 있을 것이니 적극적으로 나아가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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