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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5호] 이왕조의 비애(1)

관리자 2018-01-19 (금) 08:25 6년전 1852  

-나라는 망해도 강산은 있다

이왕조의 비애(1)

관장 고교목남(高橋公純)

사람 일관, 꿈 만관이라고 하는데, 만관의 꿈을 가지고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일째 되는 날, 9시간을 열차에 몸을 싣고 도쿄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만관의 꿈의 일각이 한 달 후에 깨지고, 그 후 순식간에 대도시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례차례로 무너져갔다. 그때마다 뜨거운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의 패전 8월 15일이 오고, 황거 앞에서 정좌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보고, 할복자살하는 군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다시 눈물이 흐른다.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인생의 꿈이 깨어지는 것과 다르지만, 만관의 꿈이 깨어지는 경험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감격은 솟아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10년 후, 나는 서점에 있는 한국관계 책이 있다면 모두 사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당시 한국에 관한 책은 적었지만 어느 날 구입한 책 중에 「대한제국 황제폐하는 한국 일체의 통치권을 일본국 황제에게 양도하다. 그날 한반도 3천리 2천만민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라는 글이 있었다.

이 글을 읽고 아연실색했다. 왜 2천만민이 통곡했는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누가 나라를 빼앗았는가? 일본인이다. 그때는 70년 전의 일이고 나는 태어나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은 일도 없고, 다른 나라 사람을 압박한 일도 없다. 그러나 일본인의 피를 가진 인간으로서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인간은 그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관계없이 「행운」과 「비운」으로 갈라지는 일이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 아무런 죄도 없이 휘말리는 사람, 그런 사회의 혼란 속에 눈 먼 민중이 뛰쳐나온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는 비운이 생긴지 36년이 지났을 때, 그때까지 행운의 자들이 이제는 비운의 자로 전락했다. 일본의 패전 즉 한국의 독립, 실로 윤회전생(輪廻転生), 인과(因果)는 돌고 도는 것이다.
전(前) 히로시마 시장 히라오카(平岡敬) 씨는 한국원폭 피폭에 관하여 「일본은 원폭피해자이면서 일본인으로서 가해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들은 다소 봉사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런 의식을 마음 한 구석에 지니고 온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새로 개설한 「한국원폭 평화전시관」회원의 여러분은 「인간의 마음의 고통」이라는 것을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 이것이 기본인 것이다.
마음의 고통을 말하며 「한국피폭자의 비애」라는 소책자를 냈다. 이 한국피폭자를 조사하는 동안에 이왕조의 비애와 많이 부딪치게 되었다.


무엇이 슬픈가? 나라가 망하는 슬픔에 필적하는 슬픔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한국에 관한 책이 일본에 많이 있지만, 이왕조에 관한 책이 적은 것은 무슨 연유일까?

함영전(咸寧殿)의 눈물

 

26대 명성황후가 조선주재 공사 미우라의 비밀 계략에 의하여 궁정 깊이 침입한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미우라 공사는 전임자 이노우에 공사와 교체한지 겨우 38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실행한 것이니까, 국가외교 경험이 전혀 없는 미우라의 배경에 큰 힘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참살당한 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 후 고종의 총애를 입은 엄비가 아들을 낳았고 이 4남이 영친왕 이은 전하로 조선왕조 28대로 인정받은 분이다.


이 이은 전하가 10세 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한국 통감직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은 전하에게 일본유학을 거론한 것이다. 어머니 엄비는 숙명, 진명, 양정의 3개의 여학교를 개설한 지식인이고, 교양이 있고 온후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격한 어조로 이토 히로부미를 육박했다.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 수학원이라는 학부가 있고, 현재 그곳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학문은 여기서 충분하니 그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토는 4번이나 총리대신 경험자이고, 막부 말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다음 손을 썼다. 그것은 일본의 황태자가 기라성과 같은 일본의 관료를 데리고 한국에 왔다. 그렇게까지 하면 한국으로서도 답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면 누구를 할까? 일본의 황태자 격에 맞는 특사, 그것은 황위계승자로 되어 있는 이은 전하 이외는 없었고, 유학까지도 약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는 유학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1년에 한번은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에 이토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했다.


떠나는 날 아침, 이토에 의하여 이은 전하는 일본 육군 소위 군복을 입고, 아버지 고종에게 인사하러 갔다. 고종은 「아무리 쓰라릴 때도 슬플 때도 그 마음을 얼굴에 나타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영친왕에게 하신 제왕학이었다. 측근이나 상궁들은 너무나 가슴 아픈 모습에 가지 말라고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태어나서 한 발자국도 궁궐 밖을 나가지 않았던 이은 전하가 바다를 건너간다. 10세의 소년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했을지 모르겠지만 그 10세 소년은 눈물을 흘리는 상궁에게 건강히 잘 있으라는 말을 뒤로하고 조용히 떠나갔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불행이 생겼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것이다. 그래서 1년에 한 번은 조국에 보내겠다고 약속한 보증인도 증명하는 사람도 없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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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은 전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10대의 소년으로 보아도 그렇다. 분명한 것은 일본은 이은 전하를 황실 대우를 했다. 메이지 천황, 황후가 여러 가지 걱정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말도 모르는 이국에서 살고 있는 소년이 밤이 되면 어머니를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부모형제를 만나지 못한 쓸쓸함에 얼마나 많이 눈물로 베개를 적셨는지 모를 일이다. 기다리기를 3년 8개월, 모국에서 어머니에 관한 전언이 왔다. 그것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알림이었다.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건강하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10살 때 떠나와서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돌아가셨다고?」


14살 된 소년에게는 인생에서 제일 참혹한 말이었을 것이다. 이은 전하는 기절했다고 한다. 이은 전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일째 되는 날에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 도착했다.


역에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한(恨)의 문화를 가진 한국, 일본에 끌려간 지 4년, 만나보고 싶었던 어머님의 죽음에 눈도 맞추지 못하고 슬픔에 흐느끼며 참고 견디는 소년의 마음이야말로 한국민의 마음일 것이다. 그 소년 전하를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소년은 모습을 들어 냈다.

「아이고!」「아이고!」「아이고!」

 어떻게 저 소년 전하의 마음을 달랠 수가 있을까? 이 세상에서 아무도 달랠 수는 없다. 그저 아이고, 아이고하고 통곡만 할 뿐이다.」


통곡을 하며 몸부림치는 민중들을 뒤로하고 전하는 덕수궁까지 계속 걸어갔다. 대한문을 들어서면 어머니가 잠들고 계시는 함영전(咸寧殿)의 지붕이 보인다. 그 함영전 입구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님이 잠드신 관이 눈앞에 보이는데 가까이갈 수가 없다. 어머니의 존안을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전염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소년 전하는 예법대로 그 자리에 서서 관을 향하여 조용히 큰절을 올리고 나서「어머님! 지금 돌아왔습니다.」라고 절규를 하며 두 눈에서 참고 있었던 눈물이 폭포수와 같이 흘러나왔다.

아버님 고종께서 나라를 떠나갈 때 아무리 슬픈 때에도 그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약속을 어기고 만 것이다.
소년 전하는 다시 일어서서 또 큰절을 했다. 실은 그대로 울고 싶은 감정을 꾹 누르고 얼굴을 들고 다시 절규했다.

「어머님! 지금 돌아왔습니다.」

이은 전하는 지금 돌아와서 어머님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큰소리로 불러도 왜 「어서 오너라.」는 말을 해주시지 않습니까? 어머님, 한 마디라도 좋으니 목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올 때까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생각하던 말, 그 마음속에 참았던 말을 마음껏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할 수 있는 말은 「어머님, 지금 돌아왔습니다.」라는 말뿐이었다.


소년 전하가 필사적으로 절규하던 귀국의 인사를 옆에 있던 상궁들은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측근도, 상궁도 그 비통하고 슬픈 마음은 폭풍이 부는 듯이 큰비가 쏟아지는 듯 눈물만 흘렸다.


아무리 부르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 어머니에게 어머님, 지금 돌아왔습니다.」이 말밖에 할 수 없는 14세의 소년의 마음은 어쩌면 이렇게도 아플 것인가?


이왕조의 비애는 이 10년 전, 명성황후의 암살로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다. 새벽의 어둠이 차츰 밝아지고 있는 아침 7시 지나서 참살당하여 그날로 유골로 된 것이다. 이 상황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만약에 한국 군인이나 부랑자들이 일본 황거 깊숙이 침입하여 그런 참혹한 일을 벌였다면 일본인이라고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어머님, 지금 돌아왔습니다.」라며 소년이 흘린 눈물, 그것을 보고 있는 측근, 상궁들이 흘린 눈물도 피눈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왕조의 비애는 이 소년 전하의 눈물이 있은 후 더욱 더 가속화되어 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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