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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3호 2016년 5월] 한국원폭의 미래

관리자 2018-01-18 (목) 09:20 6년전 1787  

- 한국원폭의 미래 -

 

관장 高橋公純

 

  지금까지는 매년 8월 6일 추도식은 태양회 회원들과 약간의 준비물과 참석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작년 한국원폭평화전시관이 개관된 이후는 전시관으로 인해 매일같이 원폭과 마주하는 나날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에 원폭전시관이 생겨 한국피폭자의 미래에 조금이나마 따뜻한 빛이 비추어지고 있을까? 그 점은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한국피폭자에게 따뜻한 미래의 전망이 열리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본다.


  먼저 현재 한국의 원폭피해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점은 일본의 피폭자도 같다. 일본의 피폭자가 무엇을 원했는가? 일본의 정치가는 어떻게 움직였는가? 일본의 사회가 어떤 말을 했는가? 그것은 다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원폭병원의 무료진료
  2. 원폭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법적인 보호
  3. 원폭피해자의 마음의 고통을 알아주는 사회단체의 탄생

  피폭자가 제일 원하는 3가지에 대하여 일본은 발 빠르게 해결을 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가? 아직은 하나도 없다는 대답이 옳을 것이다.


  한국은 피폭자들이 일본에서 피폭을 당한 뒤 조국에 돌아왔지만 국가나 사회가 피폭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보았고 또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런 무관심과 냉대와 사회로부터의 따뜻한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피폭자와 약 30여년 마주보고 지내온 「봉사단체 태양회(이 태양회가   중심이 돼서 원폭전시관을 개관)」는 그런 점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3가지를 해결하기에는 일개 단체로는 불가능하고 국가나 사회의 큰 힘이 필요한 것이다.


  3가지 사항 중 하나도 실현되지 못한 채 피폭자의 평균연령은 이미 82세, 무심한 세월은 흘러가고 모든 것이 사라지려고 하고 있다. 한국에도 피폭 2세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활동이나 흐름으로 보아 2세들이 자신들의 시대가 되었을 때, 원폭의 잔학함을 얼마나 이 세상에 호소할 수 있을까? 얼마만큼 원폭을 반대하고 즉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호소할 수 있을까? 이를 생각하면 피폭 1세의 소멸이 그대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결국 원폭피해자로서 그렇게도 갈망했던 3가지의 필요한 안건이 하나라도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한국원폭피해자로 보아 너무나 무념한 일이고 30년 동안 한국피폭자와 함께 해온 우리들에게도 쓸쓸하기 그지없다.


  왜 한국사회는 이렇게도 피폭자에 무관심할까? 그것은 원폭의 무서움, 잔혹성, 아비규환의 지옥의 현실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토야마 이치로가 부른 「나가사끼의 종」으로 눈물을 흘리고, 토게 산기치이 짧은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고, 소설 「검은 비」로 울고, 여배우 요시나가 사유리가 8월 6일에 낭독하는 원폭자의 시를 듣고 울고, 일본인, 일본의 피폭자들은 눈물 속에서 강한 결의를 했다. 그 점 한국은 8월 6일의 한국피폭자 추도식에 매년 참가해보면 일본에 대한 원망과 생활고 등을 호소할 뿐 눈물을 흘릴 정도의 뜨거운 열정은 보이지 않았는 것 같다.


  나는 이번에 일본의 나가사키 전시관을 방문하였다. 어쩌면 나가사키는 마지막 방문(현실적인 나의 나이로 봐서)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4월 7일 밤 일본의 후쿠오카 시에 도착했다. 다음 날 오카마사루 평화자료관에서 50년 만에 노면전차를 타고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입구에 섰다. 그곳에는 그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많은 단체가 와도 혼잡하지 않도록 잘 배치된 그곳에는 10분 정도만 있어도 사람을 죽이는 방법으로 원폭보다 더 잔인한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든다.


  그곳에는 운명의 11시 2분에 멈쳐진 시계가 부서진 벽에 걸려있고 평화스러운 나가사키의 마을이 있고, 11시 3분에는 사망자 7만명, 부상자 7만5천명의 희생자가 있다. 황량한 황토로 변해버린 나가사키의 마을이 있고,
시커멓게 탄 도시락 속의 밥이 남아있고, 두개골이 붙어버린 철갑모자, 굽이 뒤틀어진 유리병, 터덜터덜한 다 떨어진 옷, 인간의 뼈와 유리가 하나로 뭉쳐진 유품 등이 있었다.


  내가 이번에 일본에 온 목적은 이 원폭의 유품을 일부라도 한국에 가져가는 일이다. 그러한 유품들을 나는 그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번이나 와서 봤기 때문에 익히 알고 있었다. 관람하고 있는 동안 나가사키는 이 유품을 타국으로 이동시키는 일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이 평화헌법으로 70년 동안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를 지켜온 요인은 눈앞에 있는 원폭의 유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원폭의 유품이 일본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보물로 되어 있다. 이 귀중한 보물을 나가사키에서 한국으로 보내줄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운명의 하루가 된 4월 11일, 이날은 히로시마 원폭자료관의 시가(志賀) 관장과 4시에 미팅 약속을 했다. 이날은 G7 외상 서밋트 행사로 참석한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히로시마를 꼭 와서 봐 달라는 발언도 있었던 시기이다.


  8시 10분 텐마초등학교의 키시보 교장선생님을 만나 뵙고, 9시에는 시청 원폭원호과의 스즈키 씨를 만난 후, 신칸센으로 미하라 역에 내려 그곳에서 이쿠치 섬에 배를 타고 건너가 세토다 마을의 동사무소를 갔다. 그곳에서 세토다 마을 165번지의 한국피폭자협회 원정부 서울지부장의 출생지를 찾아 간 것이다.


  택시기사가 “여기가 165번지입니다. 저 위에 만덕사 사원인데 이 절에서 작년에 도로를 확장시키기 위해 폐가로 있던 165번지 가옥을 허물었지요”
그 허물어버린 폐가가 혹시 원지부장이 태어나서 5살까지 살았던 그 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1년만 더 빨리 왔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면서 지금은 평지로 변한 집터를 사진에 담았다.


  히로시마 원폭자료관에는 예정시간보다 빨리 3시 20분에 도착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은 어제 보았으므로 약속한 동관의 티룸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동관에 가니 외국손님이 80% 정도 앉아 있어 자리가 없었다. 입구에 헌책방이 있어 북적이는 가운데 「한국의 히로시마」라는 책이 있는데 표지 에 실린 인물이 몇 번 만난 적 있는 할아버지이어서 얼른 책을 보았다.

 그곳에는 태양회가 기증한 피폭자 위령각이 있고, 매년 내가 붓으로 직접 써서 안치한 피폭자 위패가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내가 직접 쓴 위패가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책을 본 것은 처음이라 그 책을 구입했다. 다른 책은 무거워서 다음에 구입하기로 하고 원폭자료관 접수부에 가서 관장님과 미팅 약속을 한 다카하시라고 얘기를 했다. 그러자 직원이 나를 관장실로 안내했다. 히로시마 원폭자료관은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분주한 곳이지만 시가 관장은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시가 관장과 면담이 30분이 지났다. 시가 관장은 G7 서밋트 일로 많이 바쁘겠지만 그래도 내가 일본에 온 목적을 말했다.


  “어제 자료관에 있는 피폭자의 유품을 다시 보았습니다만 굉장한 힘을 느꼈습니다. 만약 이 유품을 한국 사람들이 본다면 한국사회에서 원폭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진지하게 이해할 사람들이 많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유품을 다른 나라에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영구적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일시적이라면 예전에 빌려 준 적은 있습니다.”
  “그래요?” 내 마음이 조금 떨리는 듯 했다.


  “조금 기다리십시오” 관장이 자리를 뜨고 2~3분 후에 여직원과 같이 나타나서 한 장의 서류를 보여주었다.
  “귀관에서 피폭자료의 전시기획 말씀은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자료관은 원폭자료를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드리고........”까지 읽고 있는데 시가 관장이 얘기를 한다.


“영구적으로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일시적으로는 빌려 드릴 수는 있습니다.” 시가 관장의 이 말은 나로서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구원의 소리 같이 들렸다.


  이 다음의 일은 내가 나설 일은 아니다. 시장과 시장, 국가와 국가 간의 협의 하에 성사될 수 있는 문제다. 그리고 그 일이 한국 피폭자로 보아 밝은 전도가 생겨 생기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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