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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3호] 한국인 피폭자 조선 왕족 이우(李鍝) 전하(2)

관리자 2018-01-18 (목) 09:07 6년전 2205  

  한국인 피폭자 조선 왕족 이우(李鍝) 전하(2)

 

관장 高橋公純


  먼저 26대 고종의 가계도를 보면 이우 전하의 부친은 의친왕(이강)이고 의친왕의 모친은 장상궁이다. 즉 이우 전하는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차남이며 부친 의친왕의 기개를 닮아 총명하고 외모가 수려한 왕족으로서의 위엄이 있었다.


  대정시대에서 소화시대로 되어 이조 28대로 의친왕이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러가지 문제가 있어 나시모토미야 방자(梨本宮方子)와 결혼한 영친왕이 28대의 계승권을 가졌지만 사라지고 말았다.


  의친왕은 건(鍵)과 우(鍝)의 두 왕자를 두었고, 이 두 왕자는 공위(公位)를 계승하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에 대한 자료는 적고, 엄비(嚴妃)의 아들인 영친왕이 일본에서는 특별한 신분이어서 20명의 하인을 두고 있었으며, 고종과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난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종종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이건(李鍵) 공과 이우(李鍝) 공은 일본의 황실의 자녀가 다니는 학습원에 입학하기 위하여 영친왕의 저택에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이건 공은 육군사관학교의 42기생, 이우 전하는 45기생으로 모두 우수하였다.


  1935년, 내무대신을 지낸 박영효(朴泳孝)의 손녀인 박찬주(朴贊珠)와 결혼하여, 청(淸)과 종(淙)의 두 아들을 두고 45년 7월 16일 육군소좌이었던 이우 전하가 북경에서 히로시마 전임을 위하여 도쿄의 나시모토미야 댁에 들러 방자 님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앞으로 도쿄도 공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숙부(영친왕)님, 숙모(방자)님께서도 몸 조심 하시기 바랍니다. 무사함을 기원 드립니다. 또 건강하신 모습으로 만납시다.”라고 하며 도쿄를 떠났다.
  이우 전하는 그때까지 북경의 만몽태원 지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참모중좌로서 히로시마에 전임 발령을 받고 잠시 서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운현궁에 왔다. 운현궁은 지금 출입금지로 되어 있지만 5년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26대 고종께서 유소시절에 살고 있었던 곳이다.


  이우 전하의 부인 박찬주 여사와 몇 번 만났다고 하는 일본의 소설가 혼다 세츠코 씨는 이 운현궁에서 만났을 때, 한복을 입은 자세가 바른 우아한 모습으로 정좌를 하고 있는 모습은 감격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우 전하로 보아 대원군은 조부이기 때문에 운현궁에 살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우 전하는 박찬주 여사와 1935년에 결혼하여 이때 10살, 5살된 아들이 있었다. 중좌 정도의 계급이면 실무의 책임자이니까 이우 전하는 이 전쟁은 일본이 패배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히로시마는 제2총군의 본거지이고, 히로시마에 있는 우지나 항은 일본군단이 해외에 나가는 항구요새이기도 하다. 전쟁 종결 전에 또 종결할 때 히로시마는 많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예측은 좌관 급이라면 자연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므로 이우 전하는 히로시마에 가기보다는 가능하면 서울 용산 근처의 사령부에서 근무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로 부임을 연기하였지만 결국은 히로시마에 부임했다.


  조선 왕족은 일본 황족과 동일 대우를 받았고, 이우 전하는 「상광참모」라고 하여 다카스의 마에다 별장을 숙소로 하고 있었다. 무관으로서는 요시나리 히로무 중좌가 항상 모시고 다녔는데, 이 히로무 중좌가 무좀이 심해서 그날은 조금 빨리 사령부에 출사하고 이우 전하는 혼자서 말을 타고 사령부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 4월 10일 히로시마에 갔을 때 이우 전하가 걸었던 길을 걸어 보았다. 히로시마는 강이 많다. 오오다강(太田川)이 서구 횡천정 1정목 부근에서 모토강(本川:오오다강)과 텐마강(天滿川)으로 갈라진다. 이 모토강이 원폭 돔의 조금 앞에서 모토강과 모토야스강(元安川)으로 또 갈라진다. 


  이렇게 갈라지는 곳의 다리가 아이오이(相生)다리로서, 이 다리를 히로시마 역 방향으로 1km 정도 간 곳에 후쿠야(福屋)가 있는데 이우 전하는 이곳에서 피폭을 당했다. 만약 히로시마 성내에 총군 사령부나 제5사단 사령부가 있었다면 이우 전하는 원폭을 정면에서 받았을 것이다.


  원자폭탄의 작열은 현재 원폭 돔의 150m 떨어진 곳의 약 600m 상공이다. 폭심지에서 500m~1,000m 이내에 있었던 사람의 사망률은 83%이다.


  이우 전하가 말을 타고 있었다면 말과 함께 날라 갔을 것이다. 어떤 자료에는 「피폭을 당했지만 그대로 서쪽으로 말을 달려 모토강 다리 부근에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은 「아이오이 다리의 서쪽 끝의 방공호에서 쓰러져 있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어떤 것이 진실인가? 지금 평화공원 내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는 처음 시작이 「모토 강 다리 서쪽 끝」으로 되어 있다. 한국 왕실 이우 전하가 쓸어져 있었던 장소이기 때문에 그곳에 건립을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이우 전하가 쓰러진 곳은 아이오이 다리 서쪽 끝의 방공호가 아니고 모토강 다리로 추정된다. 다만 이것은 어느 곳이라도 좋다. 왜냐하면 아이오이 다리와 모토 다리는 다리에서 다리까지는 겨우 200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이다.


  다만 발견된 것은 오후 3시에서 4시 경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렇다면 오전 8시15분에 피폭을 당하고 오후 3시까지 7~8시간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하는 것이다. 또다시 지도를 보면 피폭지에서 아이오이 다리까지는 800~900m 정도로서 모토강 다리까지는 1,000m 정도이다.


  말을 타고 가면 5~6분 걸린다. 여러 가지 피폭 체험기를 읽어보면 2~3m 날아간 사람들은 대부분 일시적으로 기절하고 있다. 이우 전하도 기절했지 않았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지금까지 있었던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주변이 불바다로 되어 있고, 보통이라면 목적지로 가는 길을 알 수 있지만 불바다로 된 이곳은 목적지로 가는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때쯤이라면 오후 3시경쯤으로 이우 전하의 무관 요시나리 중좌는 사령부에 보이지 않는 이우 전하를 찾으러 나갔다. 원래 항상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며 경호를 하는 무관이지만 그 날은 무좀때문에 1시간 정도 먼저 사령부로 가는 바람에 이우 전하를 경호할 수 없었고, 요시나리 중좌 외 몇 명의 군인이 전하를 찾으러 나갔다. 간신히 발견했지만 바로 의사에게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히로시마 시외까지 병원으로 운반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되어 우지시나의 병원이나 닛섬의 병원은 배로 운반할 수 있어 어느 곳으로 가든 모토 강을 따라 내려가서 한번은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요시나리 중좌, 모리타, 미나미, 가네코 각 병장 5명이 이우 전하를 1.5km 정도 떨어진 닛섬 병원으로 운반했다. 지나가는 배를 붙잡아 그 배에 태웠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바다와 가까운 모토 강은 만조로 되어 있었다. 즉 바다에서 강으로 점점 해수가 들어오고 있어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곳에 마침 우지나의 효(曉)부대의 배가 2척 피난자를 수용하러 왔는데 “전하가 중병이다.”하여 그 중 한척의 배를 빌려 모토 강을 내려갔다. 강을 내려갈수록 피폭을 당한 사람들의 애원하는 비참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황족의 구출은 특별하므로 비통한 마음으로 우지나를 향했다.


  또한 그 곳에서 더 빠른 어선으로 갈아타고 닛섬의 병원(육군 일시구호소)에 입원하였지만 다음날 새벽에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다음날 밤은 통야이다. 이 통야에 도쿄에서 일본의 황족이 출석했다고 한다. 8일 유해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서울로 비행기로 운반했다. 유해가 일본을 떠난지 10분 후에 이우 전하를 보좌하지 못한 무관 요시나리 중좌는 자결을 했다. (지난 호에 할복이라고 썼지만 권총을 사용하였다 함) 

  이우 전하의 장의는 육군장으로 하고 전쟁 중의 사망이어서 1계급 추서하여 대좌로 진급되었다. 그 육군장은 8월15일 오후 1시부터, 당시의 경성운동장(현 동대문 운동장)에서 일본으로서는 성의를 다하여 성대히 법수되었지만 그 1시간 전에 일본 천황의 패전 방송이 있었고 조선은 36년간의 식민지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역사적인 광복 제1보를 걸을 때이다.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하면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은 독립한다는 보도로 이곳저곳에서 감격의 우렁찬 외침이 일어났지만 이우 전하의 장의는 엄숙하게 봉수되었다 한다. 그로부터 25년 후 1970년, 이우 전하가 원폭으로 쓰러진 모토강 다리 부근에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제막했다.


  위령비 뒷면에 위령비의 유래에는「히로시마에서 2만인의 한국인이 사망했다. 이들 희생자는 아무도 공양하는 사람도 없고 그 영혼은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며 왔지만 1970년 4월10일......원폭의 비참함을 두 번 다시 번복해서는 안 될 것임을 희구하고......히로시마의 한 구석에 이 비석이 건립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앞면에는「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라고 중앙에 새겨져 있고 그 왼쪽에 구갑 문서체로 「이우 전하 외 이만여 영위」라고 쓰여 있다.


  2만 명의 영령들의 대표로서 32세로 서거한 이우 전하가 명확하게 쓰여져 있다. 1945년 이 왕가는 영친왕, 의친왕, 이건, 이우 4명이 남아 있을 뿐으로 그 중에서 제일 희망을 건 분은 이우 전하이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이우 전하의 가계도(家系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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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전하의 피폭 당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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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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