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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3호] 올바른 원폭역사의 인식 일고(一考)

관리자 2018-01-18 (목) 07:44 6년전 1784  

올바른 원폭역사의 인식 일고(一考)

관장 高橋公純


  내가 한국과 일본이 관련된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70년 초반이었다. 그 당시의 한일 관계 책이라고 해도 일반인이 서점에서 접하는 책은 대부분 한국인이 쓴 책이고, 한일의 역사를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일본이 나쁘다, 일본 사람은 한국에 솔직하게 사죄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자 일본인이 한국을 비판하는 책이 나오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인이 한국을 비판하는 책도 나오기 시작했다. 올바른 역사적 판단은 시대로부터, 사회의 움직임에 의해, 한 사람의 권력자에 의해, 국가의 지침에 의해 변화되어 간다.


  예를 들면 1940년에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 영사관 대리 스기하라 지우네라고 하는 외교관이 있었다. 당시 독일은 유대인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학살시키기 위해 광분하였고 유대인은 일본을 통과하는 비자만 있으면 목숨을 건질 수 있어 카우나스의 일본 영사관에는 유대인들이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은 독일과 국교를 체결하고 있어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할 수가 없었다. 일본 외무성은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지만 스기하라는 개인 자격으로 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하여 다음 부임지로 떠나는 기차가 발차하기 전까지 기차의 창문 밖으로 비자를 던져서 발급했다 한다. 비자 발급 총 매수는 약 2천매, 이 비자로 인하여 6천명의 유대인의 소중한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일본이 패전하여 일본으로 돌아간 스기하라 씨는 명령 위반으로 외무성에서 쫓겨났다. 1985년 이스라엘 정부는 스기하라 씨에게 「야드바셈 상」을 수여하였고, 예루살렘 언덕에는 표창비가 세워져 있으며, ‘일본의 쉰들러’라고도 불린다. 스기하라 씨의 당시 나이 85세, 죽기 1년 전의 일이다. 이것은 독일의 판단도, 일본외무성의 역사적 인식도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한 사람 스기하라 씨가 목숨을 걸고 써 준 비자 발급의 역사적 인식이 올바른 것이라는 점이 증명되었다.


  그러면 원폭의 역사이다.
  미국이 원폭을 제조하는 맨하탄 계획을 시작한 것은 1942년 8월이다. 설계, 제조의 책임자로 젊은 오펜하이머가 임명되어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다. 1944년 9월에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이 회담하여 이 폭탄을 일본에 사용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그리고 원폭의 완성은 1945년의 7월 16일인데, 원폭이 완성도 되기 전에 미국의 제임스 박사 등 7명이 원폭 사용을 반대한다는 문서를 스팀슨 장관 앞으로 제출했다. 또한 원폭 실험이 성공한 다음날, 시카고 대학의 아사 소장이하 68명이 일본에 원폭 투하 반대의 청원서를 보냈다. 즉 미국인 중에도 양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폭을 완성한 것이 7월 16일이고 패전을 선언한 것은 8월15일이니까 불과 1개월 전의 일이다. 이 당시의 일본은 제공권을 빼앗기고 대부분의 도시가 초토화 되었고, 바다에는 전함도, 하늘을 나는 전투기도 없었으며 미국이 저공비행을 해 와도 그것을 방어할 고사포도 없는 상태라 원폭을 사용하지 않아도 일본은 이미 패전 직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미국이 서둘러 원폭을 사용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소련의 참전이 정해져 있었고, 소련이 일본 영토에 들어가면 일본의 패전 후 미국의 주도권이 약해지게 된다. 그리고 미국의 힘으로 이 전쟁을 종결시켰다고 하는 것을 세계에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원폭을 사용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 지도자는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 2차 세계대전때 일본의 지도자는 기회 즉 전략적인 「퇴거」할 때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원폭이 투하된 해인 1945년 1월부터 일본의 역사를 보면 전쟁을 종결할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예를 들면 3월의 도쿄 대공습, 이것은 일본국체 유지의 기둥인 천황이 살고 있는 황거도 불태워지고 황거가 불타면 일본의 국체는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을 생각하면 3월에 전쟁을 그만 두었어야 했다.


  4월에는 독일이 항복했다. 그렇게 되면 연합군은 일본으로 집중공격 할 수 있으니까 일본의 패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것을 생각하면 4월에 백기를 들면 좋았었다. 그리고 6월에는 오키나와가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 그 당시 일본은 군인이 부족하여 부인들이 죽창을 가지고 본토 상륙하는 미국 군인을 방어한다는 훈련을 시작했는데 오키나와에서는 동굴이나 묘소에 숨어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화염 방사기에 의해 불타 죽었다. 이 화염 방사기 앞에 죽창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단지 어찌 해볼 도리 없이 일본인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뿐인데 어째서 군부는 알지 못했을까? 이 전력의 차이를 생각해 볼 때 6월에도 일본은 전쟁 종결을 생각했어야 했다.


  적어도 7월 26일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이 포츠담 선언을 하여 일본에 항복을 권고했을 때 전쟁을 항복을 했더라면 미국은 원폭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폭자를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간단하게 전쟁을 그만두지 못할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1900년 이전에는 「당신 나라와 단교하고 전쟁을 개시한다.」고 하는 선전포고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 1907년 개전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고 개전에 앞서서 그 뜻을 상대국에 전하는 국제법이 생겼다. 그래서 일본은 상당히 신경을 써서 미국과의 전쟁을 할 때 개전 30분 전에 통고한다는 전략을 세워 워싱턴의 일본 영사관에 전했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은 한 사람의 송별회를 위해 영사관 직원 전원이 출타하여 한 사람의 외교관도 없었던 것이다. 개전 후 55분이 지나서야 선전포고의 통고서를 주었다. 그때는 이미 하와이에 있는 미국의 주 함대가 일본의 폭격기의 공격을 당해 4척이 격침되었고 나머지 함대도 대부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479척이 손상을 당해 민간인을 포함하여 3천명이 희생되었다.


  일본 측은 당연히 미국 측에 선전포고 통지가 전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기습공격이 성공했다.」고 일본은 흥분하고 있었지만 기습공격을 당한 미국 측에서는 「일본은 추악하다. 반드시 보복을 하겠다.」는 공분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일본의 초보적인 대응미스가 미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본인의 양심으로 말하면 피폭자(일본인)는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이기도 하다.


  매년 8월 6일에 반복하며 평화를 거듭 외치는 히로시마 시장, 나가사키 시장, 일본 총리대신의 추도사 속에서 「이렇게까지 무고한 살생을 한 미국이 사죄하라」고 하는 문언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본은 눈물도 흘릴 수 없는 너무나도 처참한 전쟁의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일본인은 평화의 존귀함, 그리고 감사함을 알았다. 그래서 8월 6일, 9일의 일본은 「사죄하라」가 아니고 「이제 두 번 다시 전쟁을 하지마라」, 「핵병기가 없는 세계를 만들자」, 「인류가 원하는 무너지지 않는 평화를 기원하자」 일본은 세계에서 전쟁에 의하여 제일 불행한 경험을 한 사람이 제일 강하게 반전과 평화를 주장할 책임과 사명이 있다고 믿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그 주장을 시작한 것은 전후 2년 1947년 8월 6일, 「제1회 평화제」라고 개최된 모임에서 당시 하마이(濱井) 히로시마 시장이 평화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3천명이 모인 곳에서이다. 그 후 70년이 지난 작년은 100개국에서 5만 명이 모였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히로시마에 모여드는 것일까?
  그것은 히로시마 시장 및 히로시마의 사람들이 진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그 자세를 보고 마음이 움직인 것과 동시에 히로시마에서 평화를 생각할 수 있는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히 나는 올해 G7 서밋트가 열리는 4월 10일, 11일에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이것은 1월에 계획한 것으로 서밋트에 맞춘 것은 아니지만 10일 오전 중에 원폭 기념공원을 돌아보고 많은 외국인과 만나 원폭에 대한 세계 사람들의 뜨거운 열의를 볼 수가 있었다.


  다음날 11일, 키시다 외상, 미국의 케리 장관 등 7명의 대표가 모여서 헌화를 올렸다. 여기서 케리 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오늘 일을 보고하겠다.」고 하며 「여러분이 히로시마에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대통령도 그 중 한사람이 되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이전부터 검토되었고 또 거론도 되고 있었다. (실제로 2016년 5월 27일 히로시마를 방문해서 헌화를 했다) 저 히로시마의 참상을 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합장하거나 십자를 긋는 등 이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한국 피폭자로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방일하여 아베 총리대신과 함께 히로시마에 간다면 연례적으로 보면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사과할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나는 이러쿵저러쿵 할 자격도 없다. 단지 원하는 것은 한국 피폭자도 좋은 눈으로 봐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다.


  세계에서 제일 바쁘다는 오바마 대통령이 무엇을 위하여 일본에 오는가? 한국인을 포함한 피폭자의 영령들에게 헌화를 올리고 핵이 없는 세계를 만들려는 기원일 것이다. 그것에 의하여 세계 인류가 반핵, 반전, 평화스러운 나라가 되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지금 세계에서 제일 이 일이 어렵고 제일 소중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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