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지인을 찾아서
- 나가사키 -
구호 본부에 붙여진 수용자 명단을 보는 사람들(히로시마 폭심지에서 260m)
행방불명이 된 가족이나 친지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구호소를 돌아다녔습니다.
시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유골이나 유품조차 장을 수 없었던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1945(쇼와 20)년 8월 12일 무렵 촬영/가와 요쓰기 씨
오오타가와 강 제방에 설치된 임시 구호소(히로시마 폭심지에서 1,150m)
히로시마 제2 육군병원이 전괴·전소했기 때문에 서쪽의 오오타가와 강 제방에
그 날 중에 함석이나 거적을 모아 텐트를 치고 부상자를 수용했습니다.
구호소는 피폭 직후부터 몰려든 수많은 부상자로 넘쳤습니다.
1945(쇼와 20)년 8월 9일 촬영/가와하라 요쓰기 씨
시체를 화장한다(히로시마 폭심지에서 740m)
부패로 악취가 풍기게 되어 시체 처리는 큰 곤란을 겪었습니다. 시체는 강변이나 학교의
교정 등에 모아져 화장되었습니다. 매일같이 시내 곳곳에서 화장하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1945년(쇼와 20)년 8월 9~12일 촬영/미야타케 하지메 씨 제공/아사히 신문사
슬픈 이별- 다비(나가사키)
그림/마쓰조에 히로시 씨
‘센닌즈카’라고 적힌 묘비(히로시마 니노시마초)
피폭 당일부터 부상자는 차례차례로 사망하여 신원 불명이나 인수자가 없는 시체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망자의 수는 너무 많아 같은 장소에 몇 구나 합동으로 매장되기도 했습니다.
이 센닌즈카는 1945년(쇼와 20)년 10월 16~17일
촬영/기쿠치 슌키치 씨 제공/기쿠치 도쿠코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