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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탑 건립 계획안

관리자 2018-01-27 (토) 23:59 6년전 946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탑 건립 계획안 (1)

피폭자와의 첫 만남

작곡가이자, 수필가, 방송작가에 텔레비전 프로의 사회자로까지 활동하는 지식인 에로쿠스케(永六輔)씨가 저서「두 번째의 극락왕생」에서 「히로시마의 경우, 원폭으로 사망한 열 명 중 한 명의 비율로 한반도에서 강제노동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 명에 한 사람 ! 열 명에 한 사람 !
전후 50년, NHK 프로에서 소개된 히로시마의 새로운 데이터에 깜짝 놀랐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피폭자의 수를 세는 방법에 있어서 여러 기관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다.


현재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서의 발표로는 피폭으로 사망한 4만 명, 피폭당한 수 조국으로 돌아온 사람 3만 명, 합계 7만 명이고, 현재 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회원은 2,600명이라는 것이 한국협회의 주장이다. 열 명에 한 명이라는 것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의 피폭자는 70만 명이라는 것이 되는데, 그 정도일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8월 6일, 9일이 되면 일본의 텔레비전, 신문은 눈을 꼭 감고 합장하는 사람, 눈물을 흘리면서 향을 바치는 사람, 이들 피폭자 가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격한 슬픔, 격한 분노를 지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하는 그런 말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옥의 비참함을 경험한 사람들이, 실은 열 명에 한 사람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1억이 넘는 일본인 중에 몇 사람이니 있을까?


지식인인 永六輔(영륙보)씨도 처음으로 알았던 것같이 적고 있는데, 이 책은 1955년에 출판되었으니, 나는 그 때 이미 7년 전부터 매년 한국 피폭자에게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으며, 그런 점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와 한국 피폭자와의 만남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그 때 일본 군마현(群馬県) 본응사(本応寺)의 주지로 임명받았다.

장남이 초등학교 5학년, 차남이 4학년이었다.
두 아들은 자발적으로 나의 뒷모습을 보아서인지, 출가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듯싶다. 그러나 나를 닮아서 머리는 좋지 않으나, 승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두뇌가 명석한 것보다는 인간의 슬픔,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음이다. 일본 최대의 교육자라고 해도 좋은 吉田松陰을 시민도 얼굴이 새파래질 정도로 스파르타 교육을 실시한 玉木文之進(옥목문지진)에게 감명 받아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자 “나는 玉木文之進(옥목문지진)가 되겠다고 큰 소리쳤지만, 부인도 한 번도 아이 머리에 손을 든 적도 없고, 나도 玉木文之進의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되지 않은 채, 두 놈이 부모 슬하를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비참한 인간의 생사를 보여주어서, 이러한 비참한 사람을 너희들은 구제해야 한다며 히로시마에 가고, 나가사키에 갔다. 또한 동생과 관계가 있는 시이나(椎名) 변호사(이 분은 일본 변호사협회에서 파견되어 한국피폭자의 실태를 조사하고, 법적 보호를 호소한 한 권의 책을 출판한, 한국 피폭자에게 있어서 초기의 공로자이다.)의 사무실에 가서, 거기서 발행되고 있던 신문에서 한국에도 피폭자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이것도 불가사의한 인연이겠지만, - 応寺(응사) 주지가 되고 첫 날밤이 밝은 둘째 날, 어쨌건 처음 부임한 하나의 절인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거기에 한 장년이 되는 사람이 절의 문을 들어와 나랑 딱 마주쳤다. 「신임 주지스님이십니까? 저는 재봉틀 영업사원인데, 어떻습니까? 신규 부임 축하로 부인에게 재봉틀 한 대를 사드리지 않겠습니까?」

그 때까지 매우 곤궁했었지만, 앞으로는 재봉틀 한 대쯤이야 사 줄 수 있겠지 하고 승낙했다. 이윽고 친해져서 법요를 부탁받고 그 사람의 집에 갔을 때, 그 사람이 일본 원폭피해자회의 이세자키시(伊勢崎市) 지부장인 것을 알았다. 집은 특별히 훌륭한 집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마이카를 한 대씩 가지고 있어서 승용차가 정원에 석 대가 있었다. 물론 모든 전기제품도 갖추고 중급 이상의 생활자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주지스님, 이번 국회에서 피폭자보호법안이 제출되기로 되어 있는데요, 우리 피폭자가 반드시 통과되도록 국회의사당 앞에서 데모를 해요. 조금이라도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받아내고자 생각해서요. 어떻습니까? 주지스님, 일련정종의 신자로서 데모에 참가해도 좋겠습니까?」 「아 좋아요. 민주국가의 특권이죠. 크게 해서 돈을 많이 받아 오세요.」 라고 말했지만, 당시 일본의 피폭자는 이미 승용차 석 대나 있는 중류 이상의 자정에도 피폭자에게는 돈이 지급되었습니다.

그 즈음, 집사람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이들이 출가하면 6년은 만날 수 없다. 그렇다면, 한 번도 어머니 고향에 간 적이 없으니,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가자고 해서, 가족 다섯 명이 어머니 고향과 아버지 산소를 성묘하게 되었다. 고향은 한국 경상남도 안의면이다. 그런데 우리 가족을 차에 태우고 안내해 준 신자인 추씨의 고향은 합천이라고 한다.

椎名 변호사 사무실에서 받은 신문에는 분명히 합천에 피폭자 지부가 있다고 적힌 사실이 생각났다. 추씨에게 성묘가 끝나고 그 사실을 물어본 즉, 「합천은 제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여기서 가깝습니다. 가신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 아마도 일본 피폭자보다 훨씬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겠지.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또 다른 자극을 애들에게 줄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고 안내를 받았다. 지부 사무실에 가자, 안영천(安永千)씨라는 경찰 출신의 사람이 지부장으로 마침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피폭자 중에서 가장 생활이 어려운 집으로 안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씀드리자, 안영천씨가 안내해 준 곳이 9년간 누워계셨다는 김성조씨라는 노부인 댁이었다. 방 가득이 검댕이가 발라진 어두컴컴한 방에 누워 있었다. 그래도 힘이 있는 할머니는 일본어로 「저는요 처음에 와카야마(和歌山)로 갔는데, 히로시마에 좋은 돈벌이가 있다고 해서 같이들 갔는데, 거기서 원자폭탄을 맞고 20미터나 날라가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담배 없어요?) 」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담배 대신에 세 명의 애들이 갖고 있었던 과자를 내밀었다.그러자 어땠을까? 바로 누에가 뽕잎을 아작아작하는 소리를 내면서 먹듯이 눈 깜짝할 새에 없어졌다.  이 사람은 평소에 먹지도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먹으면 변으로 배출된다. 간호사들은 그 처리를 하기 싫어서 일본 초기의 양로원은 먹이지 않았다고도 한다. 또한 먹고 배출이 많은 사람은 간호사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는 것을 여러 번 보고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 할머니가 입고 있는 옷의 소맷자락, 칼라 부분에 여러 해 동안 옷도 갈아입지 않았는지 새까만 때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초라하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9년 동안 한 걸음도 외출하지 않은 할머니와 헤어질 때가 되자  나는 「할머니, 지금 할머니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로 마음에 남아있다. 「나는요,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아름다운 고향의 산에서 아름다운 달을 보면서 하루라도 빨리 잠드는 거예요」 산속에서 달을 보면서 잠든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살아 있으면 가족에게 폐를 끼칠 뿐, 어차피 다시 걸을 수도 없는 몸이다. 그렇다면 빨리 죽어서 산 속에서 매일 밤 아름다운 달을 보고 싶다. 9년간이나 방에 처박혀서 바깥세상을 전혀 볼 수 없었던 할머니의 이 말은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이 할머니의 인생은 무엇이었나?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서 지금까지 일했던 농지가 없어지고 할 수 없이 일본으로 돈벌이하러 가서 겨우 연명하는 생활을 하다가 원폭의 참화를 당해서 이런 한국의 깊은 오지 산촌에서 머나먼 히로시마까지 갔다. 이 할머니, 고향을 떠날 때의 마음을 생각하고 지금 그 고향 산천에 빨리 잠들고 싶다는 그 마음을 생각하자 다음 말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그런 불행을 당하면서도 일본정부도 한국정부도 아무도 탓하는 것도 아니고, 고향의 산 속에서 하루라도 빨리 달을 보고 잠들고 싶다고 한다. 나는 안내해 준 추씨에게 10만 엔 정도를 주면서 「이 돈으로 할머니 내복을 10매 정도 사주 세요. 이 방에 산이 그려져 있는 벽지를 사서 사방에 도배해 주세요. 새 이불도 한 세트 사주 세요. 그래도 돈이 남겠죠? 남으면 작은 테이블을 사서 작은 라디오를 사고 꽃병을 사서 꽃을 장식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사무실에 돌아오자 안영천씨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다카하시(高橋) 선생님, 실은 저희들 피폭자는 4월에 야유회를 개최해서 피폭자가 일 년에 한 번 모여서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 일 년의 회포를 푸는 모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돈이 없어서 마을의 경찰서장이나 관공서에 가서 용돈을 받고 있는데 모이는 피폭자에게 아주 조금의 식사와 음료조차 줄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좀 해결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라고 하기에。「몇 명 정도 모이나요?」 「200명에서 250명 정도인데, 그 외의 사람들은 버스 값도 없어서 못 옵니다.」


그렇다면, 250명으로 보고, 과자, 술, 주스, 김치, 김밥, 통닭 등 다소 끼니가 되고 약간 취하는 기분이 되려면 일본 돈으로 25만엔 정도 있으면, 100만 원 이상이 되니까 되겠냐고 추씨에게 묻자 20만 엔으로 충분하겠죠? 라고 한다.

그렇다면 야유회 식사대금은 내가 내겠다하고 20만 엔은 냈다. 합게 30만 엔은 낸 것이 됐다.


안 지부장은 매우 고마워하고 기뻐하여, 나도 오늘 하루 조금은 좋은 일을 했다. 그리고 돌아갈 때에 무의식적으로 일본식 인사로 「그러면 안 지부장님 또 오겠습니다. 그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인사하고 방을 나오려 하자, 안 지부장은 지금까지의 웃는 얼굴이 갑자기 사라지고 날카로운 말이 들렸다.
「다카하시(高橋) 선생님, 잠깐만!! 선생님도 거짓말을 합니까?」
「거짓말이라고요? 그건 무슨 말?」이라고 말하기 전에 잽싸게 유리장에서 크고 두꺼운 파일을 두 권 꺼내고는「이걸 봐요」라며 책을 펼쳤다. 모두 일본인 명함이 들어 있었다.

「다카하시(高橋) 선생님, 이렇게 많은 일본인이 합천에 왔어요.  돌아갈 때는 또 온다고 해서 우리들을 기쁘게 해 놓고는 두 번 다시 온 일본인은 한 사람도 없어요. 다카하시 선생님도 또 온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오시겠습니까? 안 오신다면 지금 만나고 또 온다는 말은 거짓이 됩니다. 다카하시 선생님도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아무런 인연도 이익도 없는 곳에 처음 와서 30만 엔 내면서 거짓말쟁이 도둑이라는 말을 듣고는 정말 화가 났다.

「안 선생님, 실은 저는 승려입니다. 일본에서는 안 좋게 말할 때는 『坊主(중)』이라고 합니다만, 중은 머리가 이 정도로 짧으니까 여자처럼 머리를 묶을 수가 없습니다. 중은 부처님을 모시는 몸이므로 거짓과 머리를 묶는 일은 없습니다. 다른 일본 사람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또 온다고 말한 이상, 반드시 옵니다.」


무의식중에 말해 버렸다. 「중은 거짓과 머리를 묶는 일이 없다」 라는 한 마디가 그 후 25년, 매년 오게 되었다. 그것은 내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하나의 속마음을 말하면,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 눈을 뜬 것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쓴 “민족의 저력”이었다. 그것을 읽었을 때, 내 아버지, 내 할아버지 대의 사람들이 이렇게도 한국에 나쁜 짓을 했었나 하고 놀랐다. 나는 일본 사람이야말로 정의와 용기로 가득 찬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민족이며,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감이 그 한 권의 책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런 일은 없겠지 라며 한국에 관한 책은 책방에 있는 대로 뭐든지 사댔다.

때는 1970년대였다. 그 즈음, 한국에 관한 책의 저자는 일본인은 한 사람도 없는 상태였고, 모두 한국인, 조선인이었다.  1910년, 한국 합병으로부터 36년 동안 일본인으로부터 수모를 당한 점, 일본인이 와서 괴롭힌 일, 1919년에 일어난 “대한민국 독립선언”, 전국에 걸쳐 전개된 운동으로 조선인은 얼마나 처참하게 살해되었을까?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불과 4,5일 사이에 조선인 6천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책이 있다. 삼일독립운동 때에 살인자는 군인이라는 프로가 있었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은 분명히 조선인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고 한 사람은 일반 민중이었다. 그 살해방법의 처참함은 어땠을까?  일본인의 비도덕성, 잔학성, 잔인함, 냉혈성, 횡포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쓰여 있어, 그 사실에 반론하는 일본인은 없었다. 어쩐 일인지 그것은 1945년, 일본이 패전했을 때 한반도에 일본인은 70만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에 가담한 자, 지배국가의 사람으로서 피지배국의 사람들에게 같은 황국신민이라고 하면서 같은 인간으로서의 따듯한 배려가 없이 무심결에 우월감을 가지고 뻐개던 사람들, 다시 말해서 지배 내용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많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일본인의 “비도덕성, 잔학성, 잔인성, 냉혈성, 횡포”라고는 하지만, 여기에 한국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언제 죽어도 좋다는 일본인이 한 사람 있어요. 한일 우호를 위해서는 그러한 일본인이 계속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영천씨가 말한 “다카하시, 당신도 거짓말을 하나?”라는 말은 그런 점에 있어서는 좋은 출발이 되었다.

 
金盥(금관)

1989년, 정식으로 봉사활동 태양회를 본응사(本応寺) 내에 만들었다. 태양이란 한국어로 태양이라는 의미이다. 안 지부장과 약속을 하고, 1년 후, 약속을 했지만 나는 한국에 갈 수가 없었다. 내가 소속된 종문은 조금 까다로운 규정이 있고, 또 사회봉사 같은 것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이해하는 승려도 없고, 방한은 무리였다.

그러나 그 즈음 나를 이해해 주는 한국인이 꽤 있었으므로 그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4월의 야유회, 8월 6일의 추도식에 내 대리로 참석하게 했다. 또 12월 30일경에  한국에 태양회 회원을 일본에서 파견하여 합천의 산촌에사는 피폭자의 집을 한 집 한 짐 방문하여, 만 엔을 포장해서 자, 설날에 떡이라도 사서 드세요. 라고 했는데, 개중에는 울면서 포옹하며 떨어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여러 번 받았다.

그 즈음, 일본의 태양회  회원은 60명 정도였고 일본에서도 적지만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일본인에게 만 엔을 내밀어도 “아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로 끝나 버린다. 그러나 한국 피폭자에 대한 만 엔은 빨간 피와 피가 갑자기 소나기구름처럼 부풀어 올라서 이런 감동이 이제까지 없었다는 보고를 듣자, 만 엔이 백만 엔의 가치, 아니 금으로도 살 수 없는 큰 가치를 낳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일을 반복하기를 7년, 54세가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 온 것은 1973년, 32세였다. 그 때 한 말 중에 「나는 지바(千葉)씨의 애국의 정에 감동받아서 한국에 와 보았는데 모두가 국가를 사랑하고 불법을 순수하게 믿고 수호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빈곤, 앞으로도 빈곤할지 모르지만, 때가 오면, 냄비, 가마솥, 된장국, 식기, 저분, 헌 옷 등 전 재산을 갖고 한국에 와서 한국의 산의 흙이 되고 싶다고 바라고 있습니다.」

1995년, 54세일 때, 한국인 집사람은 일본에 온지 20년, 나와 일본사회를 위해서 노력해 왔다. 이번에는 내가 집사람과 한국 사회에 봉사할 때이다. 54세 때부터 집사람과 같이 20년을 봉사하면 74세가 된다. 내 인생의 수명은 그 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처음 왔던 32세 때, 가마솥, 된장국, 식기를 가지고 한국에 오겠다던 한국인과의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군마(群馬)종무원장 아래서 정식으로 절의 재산, 불교용품, 신자 명부 등, 일체의 점검을 받고 주지스님의 직을 반납하고 종문이라는 틀의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자유가 되었다. 우선 한 일은 대만의 228 위령추도회이다. 이것은 1947년 2월 28일, 대만 국민당이 무차별적으로 대만인 엘리트를 중심으로 4만 명 정도를 살해한 대사건이다. 이것이 국민당독재 38년이라는 긴 계엄령 때문에 228로 죽었다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등휘는 총통이 되고, 민진당이 약진하면 그 금기사항이 풀리고 40년에 걸쳐 말을 못해왔던  살해된 우리 아버지, 우리 형에 대한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 나는 대만의 228 유족협회의 초청을 받아 타이페이 평화공원에서 3천 명 정도가 모여 성대한 추도회를 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한국 원폭 위령비 건립이다.

이에 대해서는 안 지부장과 여러 번 회합을 가졌는데 위령비를 돌 벽으로 감싸고 피폭으로 사망한 사람을 그 돌 벽에 부조로 하는 안을 내 보았는데, 「그렇다면 이러면 어떨까요? 합천에서의 피폭자 수는 500명 가까이 되는데 매년 30명 정도가 돌아가고 계십니다. 그것을 매년 부조로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보다는 위령각을 세워서 그 안에 위패를 봉안하는 것은 어떨까요?」 좋다, 그렇게 하자. 라고 하게 되었고, 1997년 8월 6일에 낙경식(落慶式)을 하고, 이때 3일에 걸쳐서 하나하나 본심을 다해서 써 간 위패 421명의 영령을 거두고 그 후 매년 써 내려가서 지금은 천명 가까이 되었다.

그 산 속  깊은 합천 마을 가운데, 피폭되어 사망한 사람이 천명 가까이 되었다. 이러한 한국 산 속에서 천명 이상의 사람이 피폭해서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어째서 이러한 산 속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지? 또한 같은 부지 내에 2006년에는 「평화탑」을 건립하고 점화했다. 이러는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을 언급하고자 한다.

행동의 자유를 얻고 본격적으로 한국 피폭자와 마주한 것은 1995년 6월이었다. 제1회 봉사원조에서부터 7년이 경과했지만 피폭자들과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이 날은 「야유회」로 들판 같은 곳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듯싶은데 공교롭게도 비가 와서 급히 학교의 체육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봉사하는 측이지만, 머릿속에는 「왜 이 사람들이 피폭당했는지, 그건 일본이 합병하게 됨에 따라 총독부는 다음 해에 토지조사를 해서 상당한 토지, 산림 등을 일본의 국유화했다. 토지, 일자리를 잃은 조선의 민족은 일본으로 계속해서 일자리를 찾아서, 가장 많았을 때는 400만 명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피폭당했다. 만일 일본이 조선을 합병만 하지 않았다면 조선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폭자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가슴에 있다.

그래서 인사말에 나선 내 발언은 그러한 뜻을 포함한 사죄가 포함된 것이 되었다. 그 후에 두 명의 한국인이 인사말을 했는데, 역시 내용은 일본 지배에 대한 원한, 비판이고, 분위기는 비도오고해서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고 안 지부장은 「지금부터 노래를 부를 테니 들어 주세요」
「가라오케 대회입니까?」
「예, 그런 셈이죠.」

그런데, 가라오케 기계도 없고 앞에 나와서는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는 들어갔다. 그 체육관의 단상에 다 섯개 정도의 金盥이 있었다. 그것은 노래가 끝나면 노래를 부른 사람에 대한 상품이라고 한다. 이 시대에 가라오케 대회의 상품이 金盥? 참으로 씁쓸해 보인다. 「안 선생님, 내년 야유회는 내가 일본 제품을 가져올게요.」라 하고 다음해에는 30인분을 준비했다. 노해한 사람부터 순서대로 주었는데, 모자랐다. 다음 해에 60명분을 준비했다. 그래도 모자랐다.

대개 일본 가라오케라면 한 사람이 3분 정도로 60명이라면 세 시간이 걸린다. 식사가 끝나고 여흥 시간을 두 시간으로 보고 60인분이라면 충분하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일본이라면 노래하는 사람이 나와서는 「이름은?곡명은? 알았습니다. 그러면 잘해보세요」라고 사회자가 말하면, 랄랄라…. 하는 전주가 시작되고 노래가 시작된다.

그러나 피폭자들의 가라오케는 나와서는 이름도 말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는 것도 없이 다짜고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서는 일절만 하고는 상품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래서는 40초 정도로 끝내는 사람도 있으니, 60인분의 상품도 한 시간 정도면 소진되었다.

네 번째는 70인분의 상품을 준비했을 즈음에 태양회 회원과 피폭자들이 서로 친하게 되었고, 태양회 회원들도 노래를 부르게 되어 상품도 정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네 번째쯤 부터는 피폭자 간부 인사말 주에 일본 비판은 일절 사라지게 되었다. 한일우호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해는 조금씩 여유가 생겨서 예년의 두 배 가까운 금액을 사전에 보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도착하니 회장 입구에서 비닐 봉투에 아마도 그 날의 식사 음료수 등을 가득 넣어서 한 사람이 그 봉투를 세 개, 네 개나 가지고 여러 명, 수십 명이 나갔다. 자기는 여기서 먹고, 돌아갈 때에는 가족을 위해서도 가지고 가는 것인지…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안 지부장님. 오늘 식사를 비닐 봉투에 넣어서 계속 밖으로 가지고 가는 것 같은데, 왜 그런 일을 하나요?」 「다카하시(高橋)선생님、이해해 주세요. 우리 지부에는 600명 가까운 피폭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버스 값이 없어서 반 정도의 회원을 올 수 없습니다. 그 못 오는 사람을 위해서 일 년 중에 그렇게 간단히 먹을 수 없는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 주고 싶은 겁니다. 그 한국인의 기분을 알아주세요.」

나는 아무 말 없이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어느 해에는 가라오케 상품으로 접는 우산을 백 개 준비했다. 그러나 시작해 보니 조금 분위기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여느 때와 같이 일절만 부르고는 우산을 하나 받고 가거나, 다섯 명 정도 노래를 하면 처음에 부른 사람이 나와서는 또 하나를 가져갔다. 30명 정도 불렀을 때 두 번째 노래를 하는 사람이 4~5명으로 늘어났다.


상품담당 태양회 회원은 「당신은 두 번째네요. 상품은…」라고 말할 즈음에 제 멋대로 빼앗듯이 가져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심정에서 상품 담당을 두 명에서 다섯 명으로 늘렸다. 한 사람이 부르면 다음 사람이 오는데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세 명, 다섯 명이 마이크 근처에 모이기 시작해서 마이크를 잡고는 거기서 노래를 못 부른 사람은 제 멋대로 우산을 가지고 갔다.


두 세 명이 그런 짓을 하자 그것이 신호가 되어 30명 정도의 사람이 마이크에 쇄도하는 게 아니라 마이크에 쇄도했다. 태양회 회원은 「뭐에요? 왜 이래요?」하면서 물리치려 했지만 물리칠 힘도 없고 노도와 같이 몰려온 혼란이 3분 정도 지속되고 조용해 졌을 때, 상품인 우산은 모두 없어졌다.

이 산 속에서는 우산을 팔지 않는지? 아니면 우산은 산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간해서는 가질 수 없는 고급품인지? 2007~8년 경, 한국 경제는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기 직전까지 와 있었는데, 도시와 지방의 생활수준에 차이가 있어서, 피폭자들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가 하고 생각해서 나 자신을 납득시키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또 어느 해인가, 가끔 휠체어를 타고 참가하는 초로의 분을 만나게 되었다. 일 년에 두 번, 4월의 야유회, 8월 6일의 추도식은 지금까지는 초라했지만, 식사대, 식사 준비, 그리고 정리까지 태양회가 하게 되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카사시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사장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앞서 말한 휠체어의 초로 분에게 야유회 회장에서 마주쳤을 때, 갑자기 큰 소리로「당신 일본 사람이야?」라고 천둥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 주인을 보니 휠체어의 노인이 무서운 형상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예, 일본 사람인데요,,」 「야, 일본 사람! 나는 말이야 일본 사람 때문에 젊어서 휠체어 생활하게 되었고 청춘도 인생도 희망도 없어져서 이런 폐인과 같은 생활을 해 왔어. 휠체어 생활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일본을 원망하고 눈물을 흘렸는지 알기나 해?  알지 못할 거야.

야, 일본 사람, 나를 이렇게 만든 건 일본 사람이야.  내 청춘도 인생도 들고양이와 같은 생활을 하게 한 건 일본 사람이야. 자네 내 이러한 괴로움, 억울함, 슬픔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거기서 엎드려 사죄해.」라며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1970년대, 출처는 생각나지 않지만, 「1945年、일본이 패전했을 때, 70만 명의 일본인이 우리 땅에 살고 있었고,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이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 때 일본인 중에서 『이제까지 36년간이나 지배해서 미안해요. 이제 조선은 독립국이 되었네요. 축하해요』

그리고 전후 수십 년이 지나서 이 『미안해요』『독립을 축하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일본 정치가, 군인, 교육자, 종교인 중에 한 사람도 없다. (主旨)」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역시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하고 올바른 마음을 갖도록 말하는 햇병아리 종교인이다. 햇병아리 주제에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윽고, 한국에 오게 되고, 3만5천명으로부터 본부장이라고 부르는 임성규(林誠奎)씨에게 나는 어느 날 이런 햇병아리가 사죄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는 일본의 36년간의 지배를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써 사죄하고 싶다고 바로 고쳐 앉고서는 허리를 굽힌 적이 있다. 그 때, 임성규씨는 이렇게 말했다. 「다카하시 선생님, 그렇지 않아요. 우리들은 일본 제국이 무력으로 합병해서 우리가 괴로운 경험을 했다는 점에 다소의 감정이 있고, 원한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는 항상 일본 제국 육군의 총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총구에 발언의 자유, 행동의 자유를 빼앗겨서 불행을 경험했지만, 개중에는 선량한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선량한 분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습니다.」라고 얼버무렸다. 그래서 한국인에 대한 사죄의 마음은 가슴 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럴 때 휠체어를 탄 피폭자로부터 큰 소리로 화내며 엎드려 사죄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 때 일본 말을 할 줄 아는 피폭자가 「이사장께 무슨 소리야. 우리를 원조해 주시는 단 한 분인데. 또 누가 계신가? 이사장은 사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니까 위령각도 세워 주시고, 우리들을 원조해 주신 금액은 억을 넘어. 그런 이사장께 엎드리라는 건 뭐야.」라고 했다.

그런 도중에 나는 바로 고쳐 앉아서 머리를 땅에 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제가 태어난 때는 일본 제국이 패전하기 4년 전으로 저는 전쟁 경험도 없고, 물론 한국에 군인으로 온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에 일본 사람이 여러분 나라 사람들을 불행하게 했다는 사실을 보고 안 이상, 저는 일본인의 피를 이어받은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선조가 범한 많은 죄를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죄송합니다.」라며 다시 엎드리고 머리를 숙였을 때, 그 휠체어를 탄 피폭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피폭자의 큰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나는 이 일을 일본 사람 누군가에게 대들고 싶다고 삼십 수년간 계속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오늘로 드디어 한이 풀렸다. 내 마음은 지금 깨끗이 풀렸다. 잘 되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라며 눈물을 흘리는 피폭자의 손을 꽉 잡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

「지배해서 죄송해요. 독립돼서 축하해요.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귀향한 70만 명의 사람들로부터 한 사람도 이런 말을 듣지 못하고, 그리고 현재 번영된 일본의…교육자, 종교인으로부터도 한 사람이라도 한국인에 대해서 미안하다, 축하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을까?」 이 말을 햇병아리 종교인으로서 무언가 하고 싶다고 오랜 기간 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피폭자 눈물 속에서 「고마워요」라는 말에 나도 20여 년간 마음속에 있던 앙금이 풀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무지하게도 한국 피폭자는 합천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10년 정도 봉사 원조는 합천에만 했는데, 나중에 서울에 원폭피해자협회 본부가 있고, 한국에 7개의 지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본부에 가서 회장과 대화하던 중에 8월 6일의 본부 추도식에도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합천에는 봄 야유회에는 가지만, 8월 6일은 부산에 사는 태양회장에게 합천은 맡기고 나는 서울 본부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본부 추도식에 참석했을 때, 너무나 초라해서, 이래서는 피폭당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까지 생각했다. 개식사, 묵념,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합창, 그리고 회장, 일본대사관 대표, 일본 피폭자 대표, 거기에 내빈 한 사람 정도.  나 정도의 손님은 인사말조차 하지 못했다. 마지막은 20여명의 대표가 국화를 헌화하고 끝났다.

일본에 비해서 너무나도 초라했다. 일본은 8월 6일이 가까워져 오면 콘서트, 강연회가 여러 군데서 열리고, 반전의 노래를 부르고, 반핵, 평화를 논하며 호소하고, 수상을 비롯한 많은 내빈이 세계 각국에서 온다. 그에 비해서 이 한국의 적막함이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협회에 제안했다.

「피폭자는 3천도 정도의 열풍 속에서 죽었습니다. 3천도의 열풍을 맞으면 순간적으로 몸속의 수분이 날아가고  『물 주세요. 물 주세요』라고 말하며 죽어 갔다. 다행히도 내 집사람은 일본에 있었을 때 우라센카(裏千家)의 다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추도식에 피폭자에 대한 헌다는 어떨까요?

또한 합천에 위령각을 세웠을 때, “당신 안녕”이라는 노래를 내가 작사하고, 문화부장 작곡했습니다. 작곡이 좋아서 부르면 『악보가 있으면 주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을 정도로 좋은 노래이다. 나는 본격적인 작사가는 아니지만 『원폭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발라드』로 만든 것으로, 이것을 추도식의 맨 마지막에 태양회 부인부 합창단에게 부르게 하고 싶은데 어떨까요?

그리고 추도식이 끝나고 나서가 좀 쓸쓸하네요. 서로 아무 말도 않고 돌아가기만 하니까요. 『수고했어요』라는 의미를 담아서 태양회에서 헌다한 것과 같은 녹차와 과자를 2층 로비에서 참석자들에게 제공하고 싶은데 어떨까요?」

당시 회장으로부터 모두 좋다는 말씀을 듣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게 되었다. 집사람과 딸이 일본 기모노를 입고 헌다하고, 나는 한복을 입고 출석하니 가끔 오는 매스컴에 일본 부인이 기모노 차림으로 헌다를 하고,,,,라는 식으로 나왔다. 나는 한복이므로 한국인으로 생각되고 집사람은 일본인으로 여겨졌다. 마,, 반대이지만…

또한 “당신 안녕”은 한국에서 히로시마로 간 결혼 3개월째의 아내가 50년을 계속 기다리며 살아 있다고 믿고 있는 아내가 「당신 건강하신가요? 당신 건강하신가요?」라고 외치는 긴 대사를 두 구절 넣었는데, 이것이 공감을 얻었는지, 살짝 손수건을 꺼내서 눈가를 닦는 사람이 몇 사람 있었다. 끝나고 로비에 나오자 태양회 부인부가 녹차와 과자를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녹차 등을 마셔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적을 것이고 결코 맛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후에 나오는 과자가 그 쓴 맛을 보충해 준다.

드디어 일본 정부가 한국 피폭자를 지원해 주기 위해서 40억 엔을 출연하였고 증명만 할 수 있다면 한국인도 피폭자 수첩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나는 피폭자다」라고 해도 국가로부터의 원조는 전혀 없고, 취직에도 불리하고, 결혼도 할 수 없는 등, 뭐 하나 좋은 점은 없었고, 피폭 당했어도 말할 수 없었지만, 이런 일본 측의 변화에 따라 피폭자 수는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그래서 녹차로는 감당할 수가 없게 되고, 지금은 큰 플라스틱 통 세 개에 하나는 커피, 하나는 일본 보리차, 하나는 물로 하고, 작은 홍백색의 팥소(앙꼬)가 들어간 떡을 한 접시에 7개 정도 담아서 300명분을 준비한다. 참가자는 150명 정도인데 깨끗이 전부 소진된다. 회장은 칭찬이 반 정도 섞인 말이라고는 생각되지만, 「태양회 여러분, 이름처럼 태양과 같이 빛나고 있네요. 태양회가 없었다면 회합은 컴컴한 저녁에 하는 것 같아요」라고,,

그러는 가운데, 합천지부의 사명이 끝나고 경남지부에 봉사하기로 되었다. 이 경남지부는 태양회 사천지부 근처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사정이 좋다. 우선 사천지부 사람에게 경남지부의 8월 6일 모습을 사진 찍어서 보내게 했다. 이 피폭자에게는 지부 사무실도 없고 지부장 문 앞에 돗자리를 깔고 테이블을 두고서는 위령제를 하고 있는데, 그 제기 등이 초라하기란,,,일본 보통 가정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찍혀져 있었다.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불법 신봉자에게 있어서 신봉자는 불구(ァ具)를 중요시 한다. 그것은 불구를 보다 좋은 것으로 갖춤으로써 불전이 장엄해 지고 귀의하고자 하는 마음, 신앙심을 두텁게 하기 때문이다. 본부와 경남지부에 사원용의 큰 番炉(번로), 촛대, 특별히 발주해서 큰 위패를 만들고 일본에서 고급 향을 사서 보내왔다. 솜씨는 줄었지만 서도 6단이었으므로 모든 경전의 왕이라고 하는 蓮華經(연화경) 의 寿-ハi自我偈(수-ハi자아게)를 쓰고 8매의 병풍으로 해서 보내어 본부의 제단이 장엄해져서 훨씬 좋아 졌다.

 

경남지부에 그 불구 한 세트는 작년 8월 6일에 지부 결성 이래 처음으로 원조를 받았다고 기뻐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무슨 책에선가 읽었는데, 일본에는 원폭피해자를 원조하는 단체가 350개나 있어서, 이제는 원조할 필요가 없어져서 점점 단체가 해산해 간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 피폭자 경남지부 사람들은 피폭 68년째에 드디어 눈에 띄는 원조를 받게 된다. 봉사단체 태양회는 그렇게 큰 조직이 아니므로 피폭자에게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이다.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것은 국가도 사회인들도 피폭자에게 의외로 냉정하다는 점이다. 태양회는 20여 년간 8월 6일, 피폭자를 위한 추도식을 했지만 우리들 이외의 지원단체가 하나도 보이지 않은 것은 왜일까?

 

鎌田定雄教授(겸전정웅교수)가 한국 피폭자 조사 단장으로 1985년에 방한했을 때, 보건사회부 (일본의 후생성) 의 李(이) 의정국장과 만나서 세 가지 제안을 했는데 마치 무관심과 같은 담화를 읽은 적이 있다. 일본에서 일부러 조사단을 구성해서 한국 피폭자를 위해서 제안했는데 그 한국 책임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분노를 느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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