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들
나가사키 상업학교 보국대 농작업(나가사키)
식량이 부족해지자 교정 등에도 농작물을 심게 되어 학생들도 농작업을 했습니다.
1942~1943(쇼와 17~18)년 무렵. 제공/나가사키 피폭 사진 조사회
[사진은 글 내용과 관련없습니다.]
1945년에는 일본에 있던 조선인은 2백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 지역이 넓어지고 심해지면서 군기 만들기, 식료품 만들기, 도로 건설,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일할 사람들이 얼마든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국가 총 동원법」을 가결하여 정부는 종이 한 장으로 사람들을 마음대로 일을 시킬 수 있는 법률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조선반도까지 미치게 되었고 또 조선반도에서 토지, 집이 없어진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하여 계속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 가도 말을 할 수도 없고 일본의 문화 수준이 높은 직업은 가질 수도 없기 때문에 제일 험한 일, 몸 하나로 할 수 있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역시 인부라고 불리는 일, 저임금의 일이 많았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전체를 두 개로 나누어서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1군과 제2군입니다만 그 제2군의 본부가 히로시마(廣島)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로시마에 많은 군인과 노동자, 인부가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원폭 투하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원폭 돔이 있는데 그 바로 아래를 흐르고 있는 강이 모토야스(元安)강이고 이 모토야스 강과 꼭 붙어있듯이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판자촌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폭으로 콘크리트 건물이 파괴되어 날아갈 정도이니까 판자 집은 흔적도 없어졌을 것입니다.
한국 피폭자는 히로시마에서 7만 명으로, 그 중 즉사하신 사람이 3만5천 명, 생존자가 3만5천 명, 한국에 귀국한 사람이 3만 명, 일본에 남은 사람이 5천 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전하였습니다.]
201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