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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10) 테레진의 그림과 히로시마 피폭자의 그림

관리자 2019-10-11 (금) 15:38 4년전 1923  


  여러분, 체코의 테레진의 그림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 알고 계시는 사람이 많겠지만 여기에 조금 써 보겠습니다.
  지금부터 약 80여 년 전에 독일에 아돌프 히틀러라는 사람이 나치당의 당수로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을 세계에서 제일 큰 강대국으로 만들고 싶어 다른 국가를 침략하여 그 토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필요하지 않은 자는 모두 죽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독일에는 몇백 년 전 옛날부터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대단히 일을 잘하고 뛰어난 사람도 많아서 의사, 변호사, 예술가 등이 많이 있어 독일 사람과 사이좋게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독일 사람의 우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이 지상에서 유대인을 말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지금부터 일으킬 전쟁에 막대한 돈이 필요하게 되자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몰수하여 독일제국을 위하여 사용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은 자동차를 가지면 안 된다, 라디오를 가지면 안 된다, 전차를 타면 안 된다, 여행을 하면 안 된다는 등 차례차례로 유대인을 박해하는 법률을 만든 것입니다.
  다음은 「다윗의 별」이라는 황색 원형의 마크를 유대인의 가슴에 달게 하였습니다. 이 마크를 단 사람은 뼈가 부러질 정도로 맞는 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독일 사람은 이 마크를 단 사람을 벌레와 같이 취급해도 처벌받지 않아 이곳저곳에서 유대인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몇백 미터의 돌바닥을 걸레로 닦게 하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잡아 3열로 세워두고 뛰어넘기를 시키고, 마크를 달지 않았다고 하며 그 자리에서 총살합니다. 죽은 사람을 보니 코트 안에 마크를 달고 있었던 것이지요. 풀장에도 못가고, 전화도 사용하지 못하고, 공원이나 유원지에 가지 못하고, 저녁에는 외출도 못 합니다. 드디어 직장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약간의 배급으로 살게 하고, 병에 걸리면 병원도 금지, 어린이는 학교도 갈 수 없고, 지금까지의 밝은 가정과 웃음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1942년경이 되자 나치 독일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핀란드, 이탈리아, 그리스, 우크라이나 등 대부분의 유럽을 독일의 점령하에 두었습니다.
  이런 10개 이상의 국가에 유대인은 2천만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1942년에 「유대인 절명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50명, 100명을 한 장소에서 총으로 쏘아 죽이다가 그중에 한 명이라도 도망가면 국제문제로 발전될 것이고, 음식을 조금씩 주어 기아로 죽게 하는 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가스실을 만들어 그곳에 알몸으로 2천 명을 넣어 독가스로 30분 만에 전원 살생하는 방법이 제일 빠르다고 생각되어 이 방법을 채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곳에 가스실을 만듭니다. 제일 큰 살인공장이 폴란드에 만든 15만 평의 아우슈비츠입니다. 하루에 2만 명씩 죽였다고 합니다만, 특수부대는 유대인의 금니 등을 빼내고 여성들의 긴 머리카락은 미리 잘라서 옷이나 슬리퍼의 밑바닥 재료로 사용했다 합니다.
  그리고 시체를 바로 옆에 있는 소각로에서 태워 20분 만에 뼈로 된 것을 분쇄하여 강이나 연못에 뿌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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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소의 3단 침대(출전:matome.naver,jp)>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60㎞ 떨어진 곳에 「테레진」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프라하에 살고 있던 라야의 집에 나치스에서 호출장이 도착한 것은 1942년 2월의 추운 밤이었습니다. 나치스는 유대인에게 새로운 마을을 줄 테니까 따라오라고 하며 그 호출장에는 일가 전원이 가져갈 수 있는 짐은 50㎏뿐이었습니다. 라야 가족은 많은 사람들과 같이 기차를 타고 이웃 마을에서 내려 20㎞를 걸어서 테레진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점호를 하고 일렬로 세워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고, 16세 이상 되는 아이들은 어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라야는 12살로서 어른으로 취급되지 않아 어머니와 떨어져서 아이들 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침대는 더럽고 고목으로 만든 것으로 그곳에 가지고 간 담요를 말아서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사람이 실려 와 3인 침대에 10명이나 자게 되었습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침대에 벼룩, 이, 빈대 등이 생기고 쥐도 나오고 하여 잠을 잘 수 없는 밤이 계속되었습니다. 식사도 빈약하고 커피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갈색 물로서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밭에서 일만 계속 시켰습니다.
  원래 테레진 마을의 인구는 6천 명이었지만 순식간에 10만 명이 잡혀 온 것입니다.
  매일 아침이 되면 병든 사람이나 기아로 죽어 나가는 사람이 300명 이상이나 되고 그들은 어디론지 실려 갔습니다. 남자들은 선로공사를 하는데, 1942년 가을 그 공사가 끝나자 매일 300명, 500명씩 동쪽으로 이동한다면서 70명 타는 화물차에 150명씩 태워 사라져갑니다. 그 선로공사의 완성이야말로 최대의 살인공장 아우슈비츠가 완성된 것이고, 아우슈비츠는 테레진의 동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린이들도 동쪽은 왠지 무서운 곳이 아닌가? 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테레진에서 아우슈비츠까지는 기차로 10여 시간 가야 합니다. 그것을 2, 3일 걸려서 가는 것입니다. 갑자기 기차가 멈춰 서기도 하고 고장이 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하기 위한 수단이고, 또 하나는 식사제공을 하지 않습니다. 옆으로 눕지도 못하고 서 있는 상태로 소변을 봐야 합니다. 기차가 도착하여 내릴 때는 비틀거리고 반항심도 도망갈 마음도 일으키지 않도록 방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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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출전:matome.naver,jp)>


  그리스에서 아우슈비츠까지 10일 걸렸다고 하는데, 3분의 1은 열차 안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은 긴 행렬을 지어두고 독일병은 한 사람씩 얼굴이나 모습을 보고 좌우로 갈라놓습니다. 노인, 어린이, 몸이 쇠약해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오른쪽으로 바로 가스실로 갑니다.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왼쪽으로 수용소에서 일을 시킵니다.
  그러나 음식도 물도 위생상태도 나빠서 뼈와 가죽만 남아 죽을 운명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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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린이들도 가스실에 보내졌을까요?(출전:matome.naver,jp)>


  더욱이 12,3세의 어린이는 다른 줄을 지어놓고 높이 120㎝ 되는 나무 밑을 지나가게 하여 키가 120㎝가 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으니까 오른쪽의 가스실, 120㎝ 이상 되는 어린이들은 일 할 수 있으니까 왼쪽 수용소입니다. 그것을 알기 시작한 어린이들은 살고 싶은 마음에 필사적으로 발을 들어 키를 높입니다. 그래도 나무에 닿은 어린이는 중노동을 시킨 뒤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2년이 지났을 무렵, 이런 식으로 압박만 한다면 범행이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겨 그 방지책으로 유대인에게 악기 연주를 허가합니다. 유대인들은 채찍을 맞아 피가 흐르는 손으로, 손이 동상으로 얼어 터진 굳은 손으로 밤에 악기를 연주하고 이 짧은 시간이지만 입가에 웃음이 번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간은 우리 어른들만 가져서는 안 되겠다, 부모와 떨어진 어린이들이 있지 않은가, 용기를 낸 유대인들은 어린이에게도 이와 같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교섭을 합니다.
 “유대인에게 학문은 필요 없으니까 공부를 시킬 수는 없지만, 노래를 부르거나 게임은 일주일에 한 번씩 남자와 여자 어린이 교실을 열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때 후리돌이라고 하는 44세의 우수한 여성 화가가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손을 들었습니다.
  “나를 그 교실의 선생을 시켜 주십시오. 나는 여기에 올 때 만약 시간이 허용되면 그림을 그리려고 종이, 펜. 크레용, 물감 등을 다 가지고 왔습니다. 이 어린이들에게 그림을 통하여 활발하게 살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그건 좋다. 훌륭하다. 그래도 독일은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 들키면 사형당할 것이다. 위험한 일은 그만두는 것이 ...” 걱정하는 동료들의 말도 채 끝나기 전에 후리돌은 어린이들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힘들지만 내일은 꼭 좋은 날이 올지도 몰라요. 어머니와 같이 손을 잡고 저녁 무렵에 산책한 적이 있지요? 아버지와 같이 맛있는 사과를 먹은 적이 있지요? 그런 것을 기억해 내서 그림을 그려 보세요.”
  어린이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와 만날 수 없어 슬픈 것은 알아요. 그래도 울면 안 돼요. 내일 전쟁이 끝날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자~ 즐거웠던 그 집에서 어머니가 일을 많이 하다가 돌에 치어 넘어진 그림을 그려 봅시다.”
  지금까지 어두웠던 교실에 웃음소리가 들리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점점 더 많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공원, 학교, 서커스, 크리스마스, 공놀이를 하는 어린이. 반년이 지나자 종이, 크레용, 물감, 연필도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른들은 일하고 있던 사무실 쓰레기통에 버려진 노트나 종이조각, 포장지, 도면지, 약품이 들어 있던 빈통, 선전용 포스터를 그리던 사람은 물감, 연필, 크레용까지 가지고 와서 어린이들의 즐거움을 도와주었습니다.
  히로시마 공원 안에 사다코의 동상이 있습니다. 사다코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원폭증으로 입원하여 종이학을 천 마리 접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종이가 없어서 신문지, 약봉지, 포장지, 무엇이든 학을 접을 수 있는 종이로 사용했다고 합니다만, 테레진의 어린이들도 그것과 닮았습니다.
  후리돌 선생님은 종이를 찢어서 모자이크 그림 등을 가르쳤지만 수용소에 재료가 없어졌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어머니들은 자기 쉐타의 소매를 풀어서 빨간 실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나도! 나도! 하며 초록색, 노란색, 청색 등의 실을 어린이들에게 주었습니다.
  이 실을 붙여서 만든 그림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 테레진이라는 마을은 독일이 점령한 국가들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잡아 들인 독일은 우선 테레진에 보내어 그곳에서 제일 큰 살인공장인 아우슈비츠로 유대인을 보낸 것입니다.
  테레진에는 매일 몇백 명 몇천 명이 잡혀 와서 아우슈비츠의 상태에 따라 몇백 명, 몇천 명이 ‘동으로’라는 글자에 따라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것입니다. 여기에 보내온 사람이 400만 명, 그중에 어린이가 150만 명입니다. 이 원고 처음에 라야라는 12세의 소녀가 양친과 함께 끌려왔다는 것을 썼습니다. 그 라야가 14세로 되었을 때, 단 하루 신데렐라 공주로 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제 적십자단이 ‘아무래도 독일에서는 테레진에 어린이를 모아두고 잔혹한 학대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시찰하러 간다’고 발표되었습니다. 독일 사람은 원래 도로에 집을 짓고 뜰에는 꽃을 전혀 심지 않고 수도도 물이 나오다가 안 나오기도 하고, 목욕도 한 달에 한 번씩 몸에 물을 끼얹을 정도로 몸을 씻을 시간밖에 주지 않았고, 일하는 시간에는 화장실에도 못 가게 하였습니다. 라야는 밭에서 토마토, 오이, 무 등 야채를 재배하였는데 그 야채는 모두 독일군들이 먹는 것으로 만약 한 개라도 따 먹든지 호주머니에 넣는다면 100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그중에서 9명을 총살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항상 공포에 떨고 영양이 부족하고 얼굴색이 나쁘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제 적십자단이 오면 그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도로 위의 집은 모두 철거 시키고, 허물어진 침대는 깨끗한 침대로 바꾸고,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을 입혀 모래사장을 만들어 그네도 만들었습니다. 훌륭한 교실이 만들어지고, 라야는 어린이 대표로 책을 읽게 했습니다. 점심은 지금까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하얀 빵과 우유, 생선 통조림이 배급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은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아니, 또 생선 통조림이네”라는 불만스러운 말을 몇 번이나 연습을 시켰습니다.
  시찰단은 안심하고 돌아간 다음 날부터 따뜻한 이불도, 커텐도 모두 걷어치우고 몇백 개의 화분도 없어지고 그전과 같이 음침한 수용소로 되었습니다.
  1944년 5월 15일, 단 하루만의 신데렐라 공주를 하던 날로부터 며칠 후에 또 많은 사람이 오고 많은 사람이 실려 갔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2달이 지났을 때 라야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10명이나 어린이가 비좁게 잤는데 5명으로 줄어들고 3명으로 되어 혼자서 자게 된 10월 어느 날, 후리돌을 어머니같이 선생님 같이 생각했던 라야의 제일 소중한 친구 에리카와 30명의 소녀들이 후리돌 선생님과 같이 동쪽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라야에게 어머니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빼빼 마른 얼굴은 검게 탔지만 틀림없이 어머니였습니다.
  “라야!!” “어머니!!” 
  2년 만에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바짝 마른 어머니가 마야를 부등켜 안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이었습니다.
  “라야. 나는 내일 아침 동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별하러 온 것이다. 지금 바로 가지 않으면 같이 온 사람이 맞으니까 이만 돌아가야겠다. 라야,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 내 몫까지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 알았지!!”
  그렇게 말한 어머니는 눈물로 범벅이 된 라야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라야는 그 길로 군인 사무실에 갔습니다.
  “내일 동쪽으로 화물열차가 갑니까?”
  “그래 간다”
  “그 화물열차에 저도 태워 주세요”
  “너는 밭일의 리더가 아닌가. 네가 없으면 일이 안 되니까 남아서 일해!”
  “싫습니다. 내일 어머니가 동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나도 어머니와 같이

동쪽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가고 싶은가?”
  “가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2년 전에 동쪽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내일 동쪽으로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습니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같이 가고 싶습니다.”
  “그래? 알았다. 나는 지금 네 말을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네 마음대로 해!”
  다음 날 아침, 많은 사람들이 화물차에 타기 위하여 줄지어 서 있습니다.
군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고 있는데 마야는 이리저리 어머니를 찾아 헤맸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나눠져 있으므로 남자 줄을 넘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둘째 줄이 움직일 때 어머니를 발견했습니다. 그 행렬에 쓱 들어가서 어머니 뒤에 서서 가만히 어머니 손을 잡았습니다.
  “라야!!”
  라야는 묵묵히 윙크를 하고 머리를 옆으로 저었습니다. 그대로 행렬이 움직이는 대로 몇 명의 군인 앞을 지나 화물열차 앞까지 왔습니다. ‘이 열차 안에 들어가면 어머니에게 안길 수 있다, 이제 절대로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을 거야,’ 어머니가 열차에 타고 뒤를 따라 랴야가 열차를 타려고 하는 순간 “기다려!! 지금 타려는 젊은 여자, 이 화물열차에는 젊은 여자가 있을 리 없어. 이리 와!!” 그만 손목에 긴 회초리가 감겨 끌려갔습니다.
  “너는 밭일의 리더구나. 네 순번은 아직 멀었어”
  “아닙니다. 어제 순번이 왔으니까 타라고 했습니다.”
  “아니다. 너는 아직 순번이 아닌 것이 분명해. 남아라. 순번은 사무실에서 확인할 거야. 내일쯤 순번이 올 거야. 바로 올 거야”
  그 순간 철컥하며 화물차의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라야는 이렇게 기적적으로 살았습니다만, 또 한 사람 기적적으로 살은 사람이 있습니다. 폴란드 사람 가요비니체크 씨는 아우슈비츠에 끌려와 보리 등을 베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한 유대인이 작업 중 탈주, 독일병은 본보기로 10명의 유대인에게 아사형을 선고 했습니다. 그 10명을 뽑는데 유대인을 10명씩 몇 줄 세워놓고 그 줄에서 한 명씩 10명을 뽑았습니다. 부소장이 10명 중에서 차례차례로 사형자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남자 이름을 불렀을 때 남자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내가 있고 아이들도 있다. 고아로 만들기 싫다.”
  그때 47세의 꼴베라는 신부가 일어섰습니다.
  부소장은 상대가 신부이기 때문에 일순 당황했지만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습니다.
  “지금 선별한 사람 대신에 내가 죽겠다”고 차분한 말투로 말했습니다.
  “이유는?”
 “나는 신부다. 가족이 없다”
  “누구 대신에 죽고 싶은가?”
 “지금 아내도 아이들도 있다고 한 사람 대신에”
  군인은 가요비니체크를 제자리에 돌려보내고 10명의 사형자를 데리고 사라졌습니다.
  감사, 감격으로 말도 나오지 않은 가요비니체크를 보고 신부는 빙긋이 웃으며 사라졌습니다.
  지하실의 아사실에는 당연히 물도 음식도 주지 않습니다. 보통 10일이 한계로 9명은 차례로 죽어갔지만 꼴베 신부는 2주일 지나도 죽지 않아 독 주사를 맞고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가요비니체크 씨는 폴란드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들은 이미 폭탄을 맞아 죽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랫동안 참회의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처자가 있다” 이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면 그 신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내가 죽어야 했다. 고 참회와 참회의 인생을 살았고 평생 꼴베신부의 숭고한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였습니다.(93세 사망)
  1944년 11월, 테레진에서 아유슈비츠에 가는 화물차는 정지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가 개방된 것은 1945년 1월이었습니다. 15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곳에 유대인 700명이 남아 있었고, 그중 어린이들은 180명이었습니다.
  모든 전쟁이 끝나고 테레진의 담당자인 비리 구로아 씨가 프라하에 돌아갈 때 그 어린이들의 명부라도 없을까? 하고 그 독일군의 사무실에 가 보았습니다. 독일에 관한 것은 모두 소각되었지만 후리돌 선생님의 지도로 그려진 테레진의 어린이들의 그림이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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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리돌 선생님 / 어머니들의 쉐타의 털실로 만든 그림(‘태레진의 어린 화가들’ 책에서 발췌)>
 
  비리 구로아는 그것을 모두 트렁크에 담아 프라하에 돌아와 그 트렁크를 프라하의 유대인협회에 보냈습니다. 당시 전후의 대 혼란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의 그림에 눈을 돌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트렁크는 창고의 한쪽 구석에서 잠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유대인 사람들에게도 마음의 여유가 생겨 비리 씨가 두고 간 트렁크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굶주린 어린이들이 낡은 크레용, 연필 등으로 그린 4천 장의 그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중 한 장의 그림에 적어도 두 개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테레진의 어린이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번호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후리돌 선생님은 “너희들은 아버지 어머니가 지어준 훌륭한 이름이 있지. 독일병은 무어라 불러도 너희들은 확실하게 자기 그림에 이름을 쓰도록 하여라”
  4천 장의 그림에는 생년월일과 어린 화가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찾을 때나 테레진, 아우슈비츠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후리돌 선생님이 쓴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0년 0월 0일 아우슈비츠에, 라고 그 어린이들이 살인공장으로 끌려간 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비가 날고 있는 그림에 「도리스 와이제로와(여) 1932년 5월 17일생 1944년 10월 4일 아우슈비츠로」 쓰여 있습니다.
  화단 속에 많은 풀과 꽃이 피어있는 상공에 비행기 날개와 같은 큰 두 날개를 단 한 마리의 나비가 날고 있습니다. 이 나비는 자신이고 창공을 날아가서 먼 고향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을 그린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 소녀는 12세 10개월로 가스실에서 괴로워하며 죽었습니다.
  또 안식일을 축하하는 가족의 식사시간 그림이 있습니다. 정면에 한 사람 가장이 모자를 쓰고 앉았고, 그 한쪽에 자기 부모와 친구들의 부모인지 모르겠지만 앉아 있고 반대편에 7명의 어린이가 있습니다. 모두 14명이나 있는데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4그릇 뿐입니다. 오랫동안 식량 부족으로 음식 종류가 그것 뿐이었을까요? 「에바 마이토네로바(여) 1931년 5월 1일생 1994년 10월 28일, 아우슈비츠로」
  그리고 어머니들의 소매 털실을 풀어 어린이들에게 주고, 어린이들은 그 털실을 더욱 짧게 짤라 붙여 약 10종류의 꽃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그림은 어머니들과 공동작품 같은 것으로, 비록 쓰레기 같은 그림이겠지만 이 그림은 도화지에 그린 것이 아니고 나치스의 서류에 그려진 것입니다. 그 그림에는 「마리카 후리드아노바(여) 1933년 8월 6일생, 1944년 10월 4일 아우슈비츠에」라고 쓰여진 것을 보면 12세의 소녀도 자기가 입고 있던 쉐타의 실을 풀어 주신 상냥한 어머니들도 아우슈비츠에서 한 사람이 겨우 1㎏의 재로 된 것을 생각하면 눈물도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너무 큰 슬픔, 큰 놀라움, 처참함, 잔혹함을 보면 눈물도 말도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정말이군요.
  나치스가 유대인을 전멸시킨다고 선언할 때, 독일병은 유대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짐승이나 벌레, 그 이하로 본 것입니다.
  「겟토」라는 것은 「주위」라는 뜻으로, 시멘트 담으로 둘러쌓고 그 위에 가시가 돋친 철조망을 감아두고, 유대인을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5천 명 수용할 수 있는 곳에 20만 명을 밀어 넣은 것입니다. 죽일 목적이니까 침대, 화장실, 물, 식사, 담요 등 사람이 생활하는데 형식만 취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테레진의 겟토는 다음에 죽을 사람의 집합장소였으므로 10세 이상되는 아이들도 민감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어리광도 부릴 수 없고, 노력이나 성실함도 아무런 의미도 없이 짐승같이 일만 시키고 무서움, 추위, 굶주림에 떨면서 그린 작은 테레진의 화가들의 그림은 절망과 희망과 그리고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는 평화를 원하는 마음과 눈물을 보는 듯합니다.
  히로시마평화기념자료관에는 원폭에 관한 그림은 1,200명이 그린 그림이 4,000장 이상 있다고 합니다. 또한 최근 히로시마 모토마치 고등학교의 미술부가 피폭자의 체험을 그대로 그린 그림이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 것을 기증 받았습니다.
  한국원폭전시관은 내년 8월 6일, 즉 2년에 걸쳐서 「핵무기폐기, 반전평화의(대) 전시회」를 개최할 생각입니다만, 피폭자는 일본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10만 명 가까이 희생자를 내고 있는데, 원폭에 관한 유품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한국 사회에 핵무기폐지, 반전평화를 호소해 나갈 것인가?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면 길은 열릴지도 모릅니다.
  테레진의 그림도 130장 정도 일본에 있다고 합니다. 그림이나 사진이 전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원폭피해자는 이미 평균 연령이 85세로서 한 사람이라도 두 사람이라도 계시는 이상 피폭자에게 힘을 실어드리고 위로하여 많은 피폭자들과 함께 반전 평화의 마음을 발신해 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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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의 유광(韓日의 流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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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과 사 ​(人間의 生과 死)

​인간의 생과 사 ​(人間의 生과 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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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유필에서 배우다

 대한국인  안중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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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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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피해사진더보기▶

원폭으로 사망한 가족들을 화장, 화상을 입고 도망치는 사람

원폭으로 사망한 가족 화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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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에 쌓인 사체들, 피폭으로 자식 잃은 부모

강에 쌓인 사체들, 피폭으로 자식 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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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불바다 "살려주세요?"

도시의 불바다 "살려주세요?"​​​​화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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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의 불바다 "죽음의 재"

원폭의 불바다 "죽음의 재" ​​원폭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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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의 참상 그림(피폭당한 사람들)

히로시마의 참상 그림(피폭당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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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의 목적?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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